단기 3725년(1392) 개경(開京 또는 開城)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조 태조(太祖)로 즉위하면서 관·민심을 일신하고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기 위하여 새롭게 천도(遷都)를 계획하고 처음에 「계룡산」을 꼽았으나 산간이 협소하고 교통이 원활치 못하다는 하륜(河崙)의 만류로 좌절되자 정도전(鄭道傳)과 승려인 무학대사(無學大師)로 하여금 한양천도를 향도(嚮導)케 하였다.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왕자의 난으로 정종 때(1399년) 개경으로 환도, 태종(1405년)때 다시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조선조 500여년 도읍지가 됐다. 이에 도읍지 둘레 성벽을 쌓아 4대문을 내고 명실공히 황도(皇都)로써 명목을 갖추어 새 나라의 기반을 굳혔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도성(石築都城 -사적 제10호로 지정, 성벽 둘레 약 18㎞)은 서울 주변의 네 개 산을 연결한 타원의 또아리 형태로 놓여 있다. 그 산 네 곳은 백악(白岳 또는 북악∼342m)·인왕(仁王∼338m)·목멱(木覓 남산∼262m)·낙산(駱山 혹은 낙타산∼111m)이다.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성터를 측정 조성케 했다.
전국의 민정(民丁) 11만명을 동원하여 9월부터 축성공사를 시작, 다음해(1396)에 거의 완성되었으나, 이 해 가을에 다시 민부(民夫·丁夫) 8만명을 동원해 토축(土築)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건축성(建築城)했다. 그 다음해(1397) 4월에 동대문의 옹성(壅城)이 완성됨으로써 서울 도성의 위용이 갖추어졌다. 그 후 25년이 지난 세종 4년(1422)에 서울 성곽 및 8문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이 공사에 동원된 역부(役夫)가 무려 총 32만2천명이었으니 그 규모로 보아 그 당시 도성(都城)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서울 성곽 둘레에 좌정(坐定)된 4대문과 4소문의 본명은 다음과 같다.
Ж 4대문(四大門)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정북문(正北門)은 숙정문(肅靖門)
Ж 4소문(四小門)
동서남북 4대문 사이사이에 끼워 놓은 네개의 작은 문
- 동북 사이에 동소문을 혜화문(惠化門)
- 서남 사이에 서소문을 소의문(昭義門) : 원래는 소덕문(昭德門)
- 동남 사이에 남소문을 광희문(光熙門)
- 서북 사이에 북소문을 창의문(彰義門) : 일명 자하문(紫霞門)
이렇게 크고 작은 8문 가운데 정북문(正北門)인 숙정문(肅靖門)은 암문(暗門)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의 ‘之’자를 붙인 사유
풍수지리상 황천문이었던 광희문, 세조 4년 광희동에 옮겨
4대문 가운데 유독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갈지(之)자를 중간에 붙인 이유는 풍수지리학적 원인에 근거한다. 백악(북악)을 중심에 두고 동편에 있는 낙산(駱山, 또는 낙타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삼고, 서편의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아 길마재(鞍山∼안산)를 곁들여서 그 산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애오개와 만리재를 지나 용산구와 마포구의 지경을 이루며 효창공원과 새창고개를 건너 한강가에까지 가서 용마루(용산)를 형성하며 마무리지었다.
이에 비해 좌청룡 낙산맥은 겨우 동대문 근처에서 멈춰서 너무 짧고 산세가 약하다고 봤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동방을 뜻하는 흥인의 ‘仁’자 밑에다 갈지(之)자를 붙여 상징적으로 그 맥을 연장한다는 뜻을 세웠다. 따라서 현판에도 ‘興仁之門’이라 명시해 왔다.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이었던 광희문과 서소문
‘저승가는 문’이라해 폐쇄하고 새 문 세워
4소문 가운데 특이한 일화를 안고 있는 문이 바로 광희문(光熙門)이다. 이 문은 세조4년(1956)에 지금의 장충동 타워호텔 부근(국립극장 건너편)에 세웠던 것을 예종(조선조 제 8대 임금 1468∼1469) 때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저승가는 황천문(黃泉門)에 해당된다 하여 폐쇄하고 지금의 광희동 현 위치에 새로운 문을 세워 광희문 현판만 옮겨 걸었다. 이 문을 세칭 시구문(屍口門)이라 부른 것은 도성 내 묘소(墓所)를 쓰지 못하게 규제돼 있었기 때문에 문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광희문과 서소문으로 내보냈다. 이렇게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해서 주검시(屍)자 시구문이라고 구전(口傳)됐다.
한편, 수구문(水口門)이라 한 것은 바로 옆 부근에 삼간수문과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 장안의 물 대부분(청계천)이 이 수문을 통해 흘러 나갔기 때문에 시구문과 유사한 발음으로 수구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편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도 도성 안에서 서북 방면으로 나가는 시체들이 통과하는 문이었다. 소의문의 애초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라 했는데 성종(成宗) 때(제9대 임금, 1472년)에 부왕인 예종(제8대 임금)의 왕비 시호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 하면서 명의 중복을 피해 「소의문」으로 바꿨다.
이렇게 해서 조선조의 수도가 된 서울(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盆地)로 그 둘레에 성곽을 조성함으로써 아주 안정되고 견고한 요새로서의 기능을 겸비했으며, 황궁을 중심으로 한 왕귀족과 고관대작, 권력층과 소위 양반층, 지식층, 중류층이 주된 자리를 잡고 왕권과 정치·경제·외교 및 전통문화가 아우른 황도(皇都)로서의 경승지(景勝地)가 됐다.
인왕산 및 삼청동에서 읊은 시
북촌 시장은 거리와 잇닿았고
무성한 가을 숲은 성곽을 뒤덮었네
삼청보전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한번 종소리 울리니 대궐문을 닫네
흐르는 물은 바위 아래로 떨어지고
이슬 젖은 풀 사이로 반딧불 날아드네
멀고 먼 세상근심 이제야 잊고자
밤은 이미 깊었건만 돌아갈 줄 모르네
∼ 조선 중기의 시인 손곡 이달(蓀谷 李達)의 시∼
낙산(駱山)의 푸른 소나무
낙산에 푸른 소나무와 암석이 있어
바위로 진정하고 소나무로 절개를 삼았다네
시끄러운 아이들이 어찌 이것을 알랴마는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푸르고 바위는 바위 그대로 섰더라
∼인종때 시인 낙봉 신광한(駱峰 申光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