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인터뷰
2024년 새해 인터뷰 / 연희동 7대 토박이 박 윤 선 주민
sdmnews
2024-02-06 20:30
7대가 연희동에서 살아온 토박이 박윤선 씨
살기 어려웠지만, 이웃간 온정 넘쳤던 연희동 떠올려
고 황의순 전 미대사관 공보고문의 ‘마지막 벗’
연희동에서 7대째 살아온 박윤선 씨.
서대문 연희동에서 7대째 거주하고 있는 찐 토박이 주민 박윤선 씨를 만나 갑진년 새해와 서대문의 옛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어린시절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 근처에 집이 있었다는 박윤선 씨는 『집 부근에 동구물이 있었고, 그 물을 인근 주민들이 길어다 먹었다』고 회고한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적산가옥이 있었는데 일제가 전쟁에서 패한 뒤 적산가옥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당시 치안대에서 근무하던 오 모 씨에게 일본으로의 귀환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대신 자신이 거주하던 연희동 집을 오씨에게 주면서 큰 부를 얻게됐다』는 일화도 전해준다.

당시 적산가옥 부근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었고, 그 부근이 동구물 자리였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아랫동네에도 있었는데 5월 단오 때 되면 그네를 메어 연희동 사람은 물론 타동에서 놀러 와서 같이 그네를 같이 타며 놀았다.
지금의 사러가쇼핑센터 앞길에는 실개천이 있었는데 장마 때면 한강에서 잉어 붕어 미꾸라지 등 고기들이 올라와 삼태기로 고기를 잡아 친구와 매운탕 끓여 먹곤 하던 추억도 떠오른다. 연희교회 앞은 샘말, 연세대학교 서문앞에는 큰말이 있었고, 염비, 궁굴, 웃말으로 불리던 지명들은 지금 다 사라졌다.

연세대학교 서문 쪽 고개는 자진고개라고 불리었는데 연희동에서 재배한 대파 쑥갓 호박 등 여러 야채를 리어카에 싣고 새벽 2시 3시경에 자진고개를 넘어 아현동 고개를 넘어 중앙시장에 팔러 가기도 했다.
『배고프고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서로돕고 인심좋은 동네였는데 지금은 그런 온정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하는 박윤선 씨는 집이 가난해 제대로 학교를 다닐수 없었지만 홀로 공부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봉직하며 38년간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연세대학교는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신념을 가진 박윤선 씨는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점자를 배우라는 제안을 받았고, 연세대학교는 1970년대 초 국내 최초로 첫 맹인을 입학생으로 받는 등 선도적인 교육시스템을 갖춘 학교였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한참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80년대 도서관으로 숨어든 운동권 학생들을 발고하라는 경찰의 협박도 받았었다. 『당시만해도 그 협박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끝까지 학생들을 지켰다』며 옛 일들을 떠올린다.
박윤선 씨는 인요한 박사의 양아버지이자 황인용 아나운서의 당숙이었던 고 황의순 씨와의 특별했던 인연도 소개한다.

황의순 씨는 미국대사관 공보원(USIS)으로 활동하다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공보원 산하 리버티프로덕션 인턴으로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때 제작하던 리버티 뉴스는 매주 1회 미국의 극장에서 상영하면서 대한뉴스와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중 퇴임식을 해 준 사람은 황의순 고문이 유일하다.
리버티뉴스 종료 후에도 미국대사관에서 44년간 근무하며 공보고문을 지내다 퇴직한 황의순 씨는 북가좌동 한양아파트에서 살다 향년 88세의 나이로 지난해 별세했다.
박윤선 씨는 황의순 씨의 노년을 함께 한 벗이자 아우였다.

『황 선생님이 췌장암을 앓고 계셔서 병원을 자주 다니셔야 했는데 그때마다 동행하고 드시고 싶은 음식은 몇번이고 사다 드렸었다』는 박윤선 씨는 어느날 순대가 너무 먹고 싶다던 황의순 씨를 위해 무더웠던 여름 불광동 시장을 택시로 3번이나 왕복하며 사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힌다.
『어찌나 허겁지겁 맛있게 드시던지 천천히 드시라고 했더니 노여워하시더라』며 그 모습을 보니 아버님 생각이 났었단다.
아들과도 절연하고 외롭게 노년을 보내던 황의순 씨에게 박윤선 씨는 아들보다, 친혈육보다 살가운 사람이었다.

박씨는 본인도 77세의 고령이지만, 황의순 씨가 별세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지금도 연희동에는 오랜 토박이들의 모임인 「궁우회」가 있다.
궁우회는 초장기 40명 가까운 회원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17명정도의 회원이 남아 여행도 다니고 친목을 도모하며 만나서 안부를 묻곤 하는데 다들 연세가 있어 점점 회원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은 안타깝다.
청룡의 해인 갑진년, 박윤선 씨가 연희동 주민들에게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옛날에도 따뜻한 이웃이 있었던 연희동의 온정을 잊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함께가면 오래가고 멀리갈수 있다.

<옥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