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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5주년 기념/ 서대문 6.25참전용사를 찾아서
sdmnews 구술 정리 김지원기자
2015-06-26 10:41
폭격에 뿔뿔이 흩어지고 전염병 돌기도
휴전을 알리는 신호탄에 “이제는 살았다”감격
전쟁 후 인민군과 기뻐했으나 증오심은 여전히 남아
보건소별관 지층에 마련된 6.25 참전유공자회 사무실을 찾은 회원들이 전쟁당시 숨막히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구장회 6.25 참전유공자회 서대문구지회장

다가오는 25일은 6.25전쟁이 일어난지 65주년이 되는날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참전유공자들이 겪은 6.25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고통을 재조명 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최소 3년부터 그 이상 군생활을 오래 겪어온 노병들이지만 전쟁 당시를 이야기할때만큼은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거나 촉촉해졌다.
<편집자주>

1) 구장회  6.25 참전유공자회 서대문구지회장

전쟁 당시 전쟁 당시 난 10대였어. 해방 전 일제시대에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서울에서 어머니, 누이동생과 살고 있었는데 27일에 통장이 갑자기 집에 오더니 전쟁이 났으니 피난가야 된다고 했다. 전쟁이 시작됐고 3일만에 이미 한강다리는 폭파되어 끊긴 상태였다. 막막했다. 어렵사리 마포에서 배를 구해 강을 건넜고 인천으로 갔다. 고향 당진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다.
수원 남양만에서 갑자기 배가 멈췄다. 눈 앞이 고향인데 더 이상은 폭격탓에 위험해 못간다고 해서 어쩔수 없이 내렸다. 하룻밤을 밖에서 지새우고 다음날 배를 타고 가다가 정말로 폭격을 맞았다. 아수라장이 됐고 난리통에 어머니와 동생을 잃고 혼자가 됐다.

피난민 행렬에 끼어서 고향집에 간신히 도착해보니 마을 또한 모두 피난가고 아무도 없어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 꼬박 석달 열흘이 걸리는 동안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을 게 없으니 수박이나 참외껍질을 주워 먹으며 간신히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몇 년간 영도 다리 및 머구리배에서 잠을 자고 광복동 거리로 나와 밥을 얻어먹었다.
1953년 해병대 모집이라는 공고를 보고 배고파 죽느니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게 낫겠다는 결심을 했다. 해병이 어디서 싸우는 병사인지도 몰랐다.
부산진역에 집결해 삼랑진으로 가서 마산행 기차를 타고 진해에 도착했는데 체중이 미달이라면서 받아주지 않았다. 병력이 많이 부족했는데도 말이다. 1주일을 교육대 앞에서 농성한 끝에 27기로 입대, 3개월 교육을 받았다. 첫 출동은 중부전선 백마고지였다. 1주일 남짓 싸우고 서부전선 장단 사천강 지구로 이동했다. 지금으로치면 도라산 전망대 근처인데 주력부대 소재지였다. 3주간 전쟁한 후 휴전하는 시기가 왔다. 1953년에 입대했으니 전쟁은 약 4주정도 직접 겪은 셈이다.

휴전하던 무렵이 생각난다. 청색 신호탄이 올라가면 휴전신호이니 사격을 중지해야한다는 명을 받고 그때까지 싸웠다.7월 27일 밤 10시 드디어 신호탄이 올라가자 감격스러웠다.
『이제 우리는 살았다. 이제는 고향 찾아간다』며 전우들 손붙잡고 울었어.
서부전선 전쟁 경계선이나 보니 주저항선이 인접했던 인민군과 담배를 나눠피우기도 했어.
우린 보급품으로 양담배를 갖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우리를 욕했다. 살긴 살아 함께 기뻐했지만 이념이 달라 싸워왔으니 증오심은 여전했어. 미국 때문에 통일을 못했다는 생각에 미운거지.
휴전 이후 후방에서 13년간 근무하다 제대했다. 난 군대에 있었지만 당시 내 또래들은 휴전 후 국가재건에 한 몫한 산업역군들이다. 내 연배 젊은이들이 폐허가 됐던 나라를 이만큼 복구했다. 나라와 가족을 지키느라 전쟁통에 목숨 걸고 싸운 참전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부족하다.

전쟁 당시에는 어렵고 가난해서 대체로 못 배우고 전쟁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 전쟁이 끝난 후 학생보다는 무학자 중에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다. 최소한 최저생계비의 절반정도의 용돈 정도를 지원해줄 수 없는 것인지. 어렵더라도 나라를 위했던 사람들에 대한 예우는 죽기전에 조금 더 해줬으면 한다.  매년 한번씩 회원들이 불우회원을 돕고 있는데 우리로서는 역부족이네.세계순위 10위의 경제대국이라는데 나라를 지켜온 보훈단체에 대한 예우는 형식적인 것 같아 아쉽다.

2) 포병 및 보급지원 차제원 어르신 (85세,충현동)

전쟁 당시 난 20살. 고향이 경기도 파주라  전쟁이 난 걸 바로 알았다. 임진강 옆이라 더더욱. 구경을 하기 위해 동산에 올라가 보니 새까맣게 인민군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피난? 마을에 있다가 50년 12월부터 참전했다. 연영대상자라 경남 창녕국민학교까지 12일을 걸어가 3개월동안 보급 교육을 받았다. 전염병이 돌아 함께 입대한 마을 친구 9명 중 3명은 목숨을 잃었다.

강원도 최전방으로 이동해 보급 및 전투지원을 맡았다. 군속이라고도 하는데 인제에서 3개 군단이 포위를 당해 뿔뿔이 흩어졌다. 사나흘 굶다가 겨우 살아서 복귀했다. 이후 현역으로 입대해 포병교육을 받고 155㎜ M-1포격 부대의 창설멤버가 됐지. 철원, 인제 등에서 싸웠는데 진지가 포격 받아 후퇴하다 골짜기에 떨어져 죽은줄 알았어. 그래도 살았다. 또 다시 복귀해 휴전때 까지 근무했다. 전쟁이 책 속 옛날이야기가아니라 생존이고 현실이었던 점. 후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3) 구월산 전투부대 장기락 부회장(87세, 신촌동)부부

한편 전쟁 당시 최전방에 살았던 어린 주민들은 주로 마을에서 첩보활동을 하며 연합군의 지시를 받는 유격병으로 활약해 나중에 참전자로 인정받았다. 군번 없이 보급 및 전투지원을 했던 군속들, 포격을 피해 조금씩 기차를 운전하며 전쟁 물자 수송을 담당한 철도근무원 등도 참전자에 속한다.  서대문에는 전쟁 중에 결혼한 부부 참전자도 있다. 첩보대로 활약하며 전쟁을 지원하는 유격군 활동을 했다. 며칠이면 끝날 전쟁이란 생각에 야간에 배빌려타고 적진에서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해 돌아오는 역할 등을 했다. 강화 교동도에서 이러한 정보수집 활동이 활발했는데 이곳에서 활동 중에 희생된 자들을 기리는 추모공원이 민간주도로 최근 조성되기도 했다. 6.25참전유공자회 서대문지회에 따르면 현재 보훈청에 등록된 참전자수는 1369명, 서대문구지회에 등록된 회원은 500명 가량이다. 현재 서대문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참전회원은 148명 정도다. 


< 구술 정리 김지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