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칼럼/홍제천의 봄
자유기고가 서공이의 서대문 유래를 찾아서 3
sdmnews
2011-04-14 16:41
민족의 한 서린 홍제천
개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 병자호란
청군에 의해 희생된 조선 여인의 한 담긴 홍제천

우리는 치욕적인 과거의 역사를 말할 때 누구나 일본 제국의 조선침략과 36년간의 식민통치를 가장 참담하고 수치스러운 과거로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수치스러운 역사가 병자호란이다.

고려왕조때는 원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면서 임금의 시호에 원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忠자(충숙왕, 충해왕, 충목왕 등 )를 써야 하는 치욕적인 시달림을 받았고 조선왕조에서는 병자호란을 당해 명나라와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되어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 까지 260년간 민족의 수난이 계속됐다.

병자호란은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1일 청태종 홍타이치(皇太極)가 12만 군사(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2만)를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쳐 내려온 후 14일 만에 서울도성 가까이 통과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그간 조정에서는 왕자 등을 강화도에 피란토록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여 적과 대치하다 1637년 1월 13일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하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서 적장에게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한 수항단에 올라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육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 개국 246년이 지난 후 국왕이 적장 앞에 몸소 머리를 조아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잔악한 청군은 도성을 누비며 재산을 약탈하고 백성을 무참히 살해하고 궁성과 민가에 불을 질러 아비규환의 도탄에 빠뜨렸다.강화 이후 청태종은 수많은 재물과 60만에 가까운 백성을 전리품으로 끌고 갔다.

그 중에는 처녀와 미모가 뛰어난 유부녀가 대부분이었다. 졸지에 딸과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사람들은 전답을 팔아 소위 속환전이라는 돈을 청나라 사람에게 주고 찾아왔다. 이렇게 조선을 다시 찾아온 여인네를 환향녀(還鄕女: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 했으며 그 후 더렵혀진 여인이라는 뜻으로 화냥년이란 말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 환향녀들은 자신의 순결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자결을 하는가 하면 돌아온 여인들도 청군에 더렵혀진 여인이라는 주위의 손가락질과 내 쫓김에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슬픈 신세가 됐다.
인조임금은 환향녀가 사회적 문제가 됨에 홍제천 물에 몸을 씻고 도성에 들어오면 다시 정조에 대한 논란을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홍제천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 허물을 씻듯 푸른 물이 다시 흐르게 하고 다시는 이 땅에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각자의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서대문구 「내고장 옛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