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칼럼/홍제천의 봄
자유기고가 서공이의 서대문 원형을 찾아서 2
자유기고가 서공이
2011-02-09 15:29
서대문구의 진산(鎭山) 무악(毋岳)
무악재는 중국사신이 통과하던 길, 연희궁의 배경

무악은 일명 안산(鞍山)으로 안산의 정상이 동봉과 서봉으로 이루어져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악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서대문구의 진산(鎭山)임에 틀림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소가 멍에를 지고 고개를 올라 굴레방다리에서 고삐를 벗고 와우 산에서 누웠다고도 한다. 무악은 산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면 돌이 많다는 속설같이 정상부의 봉수대 부근은 화강암의 잔구로 돔(dome)형태의 원봉을 형성하고 있다. 편마암으로 구성된 안산의 남서쪽사면인 봉원동·연희동 일대는 경사가 10° 안팎의 완만한 경사면으로 섬모양의 구릉과 잔 봉우리가 산재하여 수려하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이 편안하다.

산 끝자락에 도로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안쪽은 시장, 상가 등이 있으며 조금 더 안쪽은 주택, 아파트 등 주거지역을 형성하고 더 안자락은 산책로와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민의 생존터이다.
안산 무악재는 도로가 나고 몇 차례 깍아서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고개가 높고 험준하여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무악재를 넘으려면 여러 사람을 모아서 넘어 모아재라 부르던 것이 무악재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과 태조가 무학대사를 데리고 도읍터를 물색 중 고개에서 쉬고 간 후 무학현이라 했다고 전하나 그 신빙성은 적다.

무악재는 중국사신이 통과하던 도로로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하늘이 천길의 한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천명의 군사를 누를만 하다』고 말했다. 한때 하륜이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을 들어 태조에게 천도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여 1393년 7월 음양 산정도감을 두고 정도전, 권중화, 성석린 등으로 하여금 현지를 살피도록 하였으나 교통에 편리한 점은 있으나 풍수상으로 주산이 빠지고 산수가 포위하지 못하여 지형이 좁아 신도읍지로 불가하다라고 판정되었다. 그 후 무악주산론은 계속 생명력을 지녀 세종때 서남쪽에 연희궁이란 이궁을 지어 정종이 왕위를 선양하고 거처하였던 곳이다. 또한 연희궁은 왕실의 잠실로 이용되어 정5품관리를 배치하기도 했다. 1642년에는 이괄이 인조반정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부병사로 부임하기 전에 난을 일으켰다 평정되기도 했다. 이때 무악봉수대를 이용하여 반란군을 진압한 사실이 전한다.

한편 무악에서 남쪽으로 뻗어 첫 번째 봉우리를 이룬 205m 고지를 금화산이라 부른다. 금화산의 이름은 산 형세가 둥글고 곱다는 뜻으로 그 서쪽에는 이화여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뻗어난 산줄기 가운데 해발 125m 고지가 복주산이다. 복주산 아래 북아현동 중앙여고 터는 일명 애기 능인 의령원으로 사도세자의 큰 아들인 의손세손이 묻혔던 곳이기도 하다.

봉원사 북동쪽으로 기울어지는 안산 능선에 자연적으로 생긴 흰 돌들이 묘하게 연결되어 마치 관음보살이 합장하고 동편 하늘을 우러러 보고 누워 있는 듯 한 모습의 관음바위가 있다.
서울 시가지를 향해 있어 서울의 평화를 지켜준다고도 한다. 또한 인왕산 국사당 옆에는 여근암이 있으며 그 맞은편 이화여대를 굽어보는 위치에 주변 바위와 어울려 장대한 남근석이 있다. 이런 자연환경으로 볼 때 무악은 오래전부터 유·불·선교, 무속 등 종교의 터전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 「서대문구지」서대문구, 1992
「서울명소 600선」서울시, 「서울의 산」서울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1권, 주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