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西大門區) 명칭의 유래가 된 서대문(西大門)은 언제 만들어졌으며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서대문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 될 것이다.
1392년 7월 역성 혁명을 성공한 태조 이성계는 다음해(1392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새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천도계획을 추진한다.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한 것은 이곳이 한반도의 중심지로 육상교통의 편리와 해상과 한강을 이용한 물자운반이 용이하며 북악, 인왕, 목멱, 낙산의 내사산과 북한, 덕양, 관악, 용마산의 외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 등이 천연의 요새지로 일국의 수도로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1394년 신도궁궐도감을 설치하여 새수도 건설계획을 추진하던 중 그해 11월 26일(음력 10월 25일) 개경을 출발, 3일 후인 29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다음해 9월에 궁궐과 종묘사직건립을 완료하여 전도600년의 초석을 세웠다. 1392년 윤9월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수도를 보호할 도성을 수도의 내사산 정상을 연결하여 연장 9775보(步)(약18㎞)를 완성했다.
그리고 완성된 도성에 네 개의 대문과 네 개의 소문을 만들어 도성에는 총 8개의 문이 만들어졌다.
4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오상(五常)가운데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 한 글자씩 붙여서 지었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이런 틀을 따르면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자가 들어가야 하나 정(靖)자를 넣어서 숙정문(肅靖門)이라 하였다. 「꾀정」자가 「슬기지」와 뜻이 통하기 때문에 살짝 변화를 준 것이다.
4소문의 이름은 동소문이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이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이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서북이 소문이 창의문(彰義門) 또는 별칭인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서대문의 명칭이 맨처음 나타남을 볼 수 있으며 서대문, 서소문, 창의문(西大門, 西小門, 彰義門) 외곽이 변하여 서대문구 지역이 된다. 한편 궁궐과 도성축조의 설계와 기초를 마련하고 이름을 지은 사람은 정도전이다. 도성축조 공사의 총지휘는 심덕부와 조준등이며 서대문의 최초 위치는 성곽의 위치와 사직단등을 고려해보면 현재 사직터널 부근임을 추측할 수 있다. 1395년에 축조된 서대문(敦義門)은 태종13년(1413년) 풍수학자 최양산이 경복궁의 지맥이 손상돼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폐쇄하고 그 남쪽 지금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쪽으로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고 했다.
다시 세종4년(1422년)에는 서전문이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이 불편하다 하여 더 남쪽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 도로에 새로 문을 내 본래 서대문의 명칭인 돈의문이라 하고 대륙으로 향하는 의주로의 관문역할을 해왔고 1819년에 서대문 밑으로 전차길을 냈으며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아래 1915년 도로확장을 구실로 철거하여 현재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서소문은 원래 소의문(昭義門)이라 하였으나 성종때(1472년) 부왕 예종왕비 시호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 하면서 소의문으로 바뀌었다. 소의문은 지금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가는 마루턱에 있었던 것으로 남대문과 가장 가까운 문으로 삼개나루로 가는 길로 이 문 밖에는 칠패시장(남대문밖)으로 통하여 시장, 산업의 현장으로 가는 길이다. 이 또한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헐리고 말아 우리구와 관련이 있는 두 문은 없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여 표지와 복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서대문구지, 홍순민 「우리 궁월 이야기」정년사, 조선일보 「서울의 궁궐」, 서울시 「서울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