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대 김경구 교수의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15일 저녁 10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역사와 문화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김환옥 전 서대문문화원장을 모시고 꼭 방문하고 싶은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날 오전 10시 김경구 교수의 자택이 있는 홍제동 한화아파트를 찾았다.
김경구 교수와 그의 지인인 김인길 세무사와 함께 탐방에 나선 곳은 우리나라의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기념관인 이화장.
이곳은 금년 4월26일 문화재로 지정, 새 기념관 건립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고, 이승만 박사의 양아들인 이인수 박사와 부인 조혜자여사가 기거하고 있다.
이화장 찾아가는 길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이화장이 있다. 혜화동과 대학로에 인접한 곳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일행은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김인길 세무사의 기억을 쫓아 혜화동대학로 뒷길로 이화동에 접어들었다.
<-이승만 박사의 평생 소원을 담아 친필로 쓰여진 남북통일과 경천애인 현판이 걸린 통일관.
그러나 다음순간 당황과 방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60이 다돼가는 김 세무사는 더 이상 변해버린 옛길을 기억하지 못했다. 건국대통령의 기념관인 이화장이라고 하면 누구든 TV에서 드라마를 통해 보았건, 구전을 통해 들었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일 터.
우리는 차창을 열고 행인들에게 이화장의 위치를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여섯 사람에게 물어도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모른다는 손사래 뿐….
일행은 조그만 화원에서 상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이화장을 찾을 수 있었다. 김환옥 전 원장은 『아마도 역사의 현장인 이화장을 국가와 자치단체가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면서 『몇 년 전 골목길을 비롯한 길이름과 지번을 바꾸면서 진입로를 이화장길로 하고 안내표지라도 제대로 했다면 찾기 쉽고 알기 쉬웠을 것』 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화장에 도착해 초청자인 김일주 사무총장((사)건국 대통령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에게 확인한 결과 진입로는 이화장길로 명명되어 있었으나 안내표지가 부실한 상태였다.
이화장을 본 느낌
연희동에서 우람하고 삼엄한 전직대통령 사저를 보아온 우리는 초소하나 없이 낮은 담장너머로 소나무를 비롯한 수목이 잘 가꾸어진 고풍스러운 한옥을 마주하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벽돌로된 문기둥에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라고 쓴 동으로된 명판이 회색으로 변색된 채 붙어 있다.
철대문옆 쪽문을 열고 이화장 앞 이곳저곳을 살피는 일행에게 젊은 청년이 다가 왔다. 김 총장을 찾아온 분들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자 대문을 열어준다. 제일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다. 오른손을 치겨들고 단호한 표정으로 서있는 모습은 늙은 할아버지로만 묘사돼 오던 방송과는 다르게 독립의 의지와 자유에 대한 신념이 강하게 베어 나온다. 우리를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통일관. 과거 대통령당선자 시절 비서실로 이용되던 공간으로 조각당, 본관과 함께 금년 초 문화재로 지정됐다. 통일관의 처마 밑에는 이승만 박사가 친필로 쓴 「남북통일」, 「경천애인」이라는 휘호가 박사의 평생 업이 무엇이었던가를 대변하고 있다.
물받이가 없어 기둥뿌리가 썩어가던 이곳을 김 사무총장이 금년 초 부임한 뒤 부던히 노력한 끝에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보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건국내각이 짜여진 조각당
통일관 옆 금붕어가 노니는 연못을 지나 몇 계단을 오르면 이 박사가 장고 끝에 대한민국 최초의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여러 경로의 추천을 받아 조각을 완성한 「조각당」이 나온다. 불과 10평도 못되는 허름한 목조한옥으로 이곳에서 최초의 내각이 짜여졌다는 설명에 신비감마저 인다. 이 박사는 조용한 이곳에서 1948년 8월경 달포간 추천서를 보고 면접을 한 뒤 최초의 내각을 구성했다. 조각당이라는 현판은 1987년 제헌절 날 제헌국회의원들이 이 박사가 남긴 휘호 중 필요한 조각을 집자해서 새긴 뒤 걸었다고 한다. 조각당 안에는 이박사가 쓰던 돗자리와 나무탁자 등 유품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기념관으로 쓰이는 허름한 본관
기념관으로 쓰이는 본관은 우리가 현대사를 얼마나 등한시하며 살았는지 반성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이박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사진들이 「ㄷ」 자형 벽면을 따라 정리돼 있는데, 비바람에 변색되거나 빗물이 스며 얼룩이 선명한 사진도 허다하다.
<-이화장 본관 기념관 전시물이 옥외 노천에 방치돼 있어 상태가 많이 훼손돼 있다.
여염집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오래된 사진보다도 보관상태나 관리상태가 허술해 저절로 혀가 차질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이화장의 역사적 가치를 인식, 기념관을 새로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김 총장의 설명이었다. 본관의 내부는 수리가 진행중이라 관람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 박사의 집무실과 침실, 대청마루, 객실 등으로 구성돼 있고, 유품도 전시돼 있다고 한다.
이박사의 양자 이인수 박사와 며느리 조혜자 여사
생활관에 들어서면서 온화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이인수 박사와 조혜자 여사를 처음 만났다.
<-윗줄부터 김경구 오산대 교수, 김환옥 전 문화원장, 김인길 세무사, 김일주 사무총장. 아래는 이승만 전대통령이양자인 이인수 박사. 조혜자 여사
7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두 내외는 건강했고, 온화한 표정과 말씨로 내방객들을 편안하게 했다. 조 여사는 이 박사와 담화를 나누는 동안 따뜻한 차와 싱싱한 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생전에 즐겨 드셨다는 장떡을 내오셨다. 평소 즐기시던 간식이라기에 음미하며 먹어보니 여염집의 장떡 맛이다. 별도의 멋을 내거나 맛을 내지 않은 단촐한 모양에 달지 않은 구수한 맛이다.
이인수 박사는 자유민주의와 반공을 국시로 교육입국의 기틀을 마련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적 편향 때문에 평가절하 하거나 왜곡해온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제라도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현명하게 제시하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이박사와 건국정부의 업적이 바르게 평가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인수 박사는 『우남께서는 천부의 시인이었으며 예술의 향기를 지닌 어른이었지만 풍운의 시대가 시인이나 예술가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뒤 『우남의 나라사랑은 조국강산과 직결된 것이었고, 우리나라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평생토록 가슴에 안고 사셨다』고 그리워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 박사는 또 『아버님생전에 교육입국의 실현으로 인재가 양성되고 기간산업이 육성되었으며, 자유민주제도와 시장경제를 도입,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한점, 국가안보를 위한 국군의 증강과 1953년에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이 국가안정의 기반이 되어 경제와 국가를 크게 발전시킬 잠재력을 가지게 됐다는 점은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 박사와 조여사는 이화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건국(이승만박사의 나라세우기)」과 「이승만대통령의 건강」등 각자의 저서를 선물했다.
이화장의 역사
이화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1947년부터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이사 하기전까지 거주하던 집이다.
1948년 8월 이곳 조각당에서 우리나라 건국이후 초대 내각을 조직했으며, 관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여사 유품이 소장돼 있어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념관은 1920년대에 지은 「ㄷ」자형 한옥으로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집무실, 실, 대청마루, 침실, 부엌 등 모두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이박사는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긴 뒤 3개월간 머물 목적으로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하와이로 떠났으나 정부의 반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1965년 7월19일 서거하고서야 미군 군용기로 유해를 운구, 이화장에 안치한 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이박사 서거 후 프란체스카여사와 양아들 이박사 내외는 이화장에 거주하고 있으며, 프란체스카여사는 1992년 돌아가셔 남편 곁에 안장됐다.
<정정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