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음력 정월대보름날에 서울 재동에 있는 취운정 앞 6간띄집으로 수십 명의 선각자들이 모여들었다. 홍암 나철(弘巖 羅喆)·오혁(吳赫)·이기(李沂)·김윤식(金允植) 등이었다. 이분들은 우리민족 시원(始元)의 국조를 받드는 대종교(大倧敎)의 중광을 선포했다.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을 앞두고 민족자주정신을 되살리며 그 역량을 모을 단합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왜 창시(創始)가 아닌 중광(重光)인가?>
국조의 가르침에 대한 민족고유의 신념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부여의 대천교, 고구려의 경천교, 신라의 숭천교, 발해의 진종교, 고려의 왕검교, 만주지역의 주신교 등 다양한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왔다. 그러던 중, 고려 중엽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하여 민족시원의 역사인 교원(敎源)이 끊기는 바람에 약 700년간 단절폐색 되었다가 일제의 침략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사대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투쟁의 신념적 구심점에 대한 염원이 애국지사들로부터 나오게 됐다.
이러한 애국지사들의 염원에 의하여 고유 신념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간 몇몇 인물들에 의해 암암리에 지켜오던 민족 신앙의 경전들과 가르침이 이를 애국지사들의 대표자인 홍암대종사님(홍암 나철)께 전수되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니 이것이 바로 대종교 중광이었다. 그렇기에 대종교는 창시가 아닌 「다시 빛난다」는 의미로 중광(重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중광절이 가지는 기념비적 의미>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대종교의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계승한 것으로 중광절을 통하여 비로소 널리 알려졌고 이후 대종교는 항일독립투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무오독립선언, 청산리대첩 전승, 신흥무관학교 설립, 상해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건국 등 독립투쟁사에 굵직한 사건은 바로 대종교의 중광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또한 신채호, 김좌진, 정인보, 주시경, 나운규, 지석영, 홍범도, 이청천, 이범석 등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진충순국한 10여만명의 위인들을 배출하고 국립현충원 내 애국지사묘역의 태반이 바로 대종교인이다. 중광절은 음력 1월 15일, 서기 2009년 올해는 양력 2월 9일이다.
<자료제공 대종교 총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