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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마셔야 필름이 끊길까?
글 : 김은영 과학전문 기자
2007-12-26 17:38
필름 끊기는 현상, 뇌가 보내는 경고
기억단절 반복되면 뇌질환 증후군 위험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겹친 12월. 송년회다 모임이다 해서 유난히 술자리가 많다.
40대 김 과장도 연일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요즘 뭔가 이상하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술을 먹기만 하면 기억이 뚝-뚝- 잘도 끊어진다. 처음엔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하고 웃어 넘겼는데, 두세 번 반복되다 보니 걱정이 된다.
마시는 양을 줄여보기도 하고 소주 대신 고급 양주를 마시기도 했지만 증세는 심해질 뿐. 급기야 송년회 중간에 기억이 사라진 뒤 눈 떠보니 사무실 바닥에서 자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단기기억중 중요한 부분만 기억

장기기억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기억 단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 과장처럼 「필름 절단 사고」를 한두 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필름 끊긴 상태에서 벌이는 추태도 걱정이지만, 내가 했던 일인데 나만 기억을 못 하고 있다는 두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술을 마시면 왜 이렇게 필름이 끊기는 걸까? 필름이 끊기는 이유를 말하려면 뇌의 기억 매카니즘을 알아야 한다.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단기기억은 1분에서 1~2시간 이내의 경험이나 감정이 뇌에 임시로 저장된 것이다. 단기기억 중 중요한 부분만이 장기기억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은 뇌의 앞쪽인 측두엽 안쪽에 있는 「해마」라는 기관이 담당한다.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못한 단기기억은 곧 사라진다. 반면에 일단 장기기억으로 전환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건망증을 호소하는 이유는 장기기억을 꺼내지 못하거나, 단기기억이 아예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않았던 탓이다.

술 마시다 발생하는 「필름 절단 사고」는 바로 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문제가 발생해서 일어난다. 즉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기억을 꺼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장된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술 마시다 사라진 기억은 최면을 걸어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 중간의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것은 기억이 저장됐다 안 됐다 했기 때문이며, 김 과장처럼 「술 마시다 정신 차려보니 낯선 방」 상황은 그 사이의 경험이 통째로 저장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술을 마실 당시 만난 주변 사람들은 당사자가 필름이 끊겼다는 것을 알지 못 한다. 해마 외의 다른 부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서 술에 취한 것을 빼면 말이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저장돼 있는 중요한 기억들, 즉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은 멀쩡히 살아있기 때문에 계산을 하거나 집에 돌아가는 데도 전혀 이상이 없다. 오직 기억만이 사라질 뿐이다.

혈중 알코올 농도 0.2%에서 필름 가장 많이 끊겨
그럼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기억이 끊길까?


70년대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필름이 가장 많이 끊기는 시점은 보통 혈중 알코올 농도 0.2% 정도라고 한다
.
이는 체중이 70kg인 남자가 25도인 소주를 한 병 반 조금 못 되게 마신 정도다(소주 한 병 반 = 약 500ml).
물론 이 결과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몸 상태나 술을 마신 속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드물게 선천적으로 필름이 안 끊기는 사람도 있다.

필름이 끊기는 현상은 조금 과장하자면 뇌가 술 마시는 중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거기다 김 과장의 예처럼 한 번 「끊기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예전보다 쉽게 끊긴다.

쉽게 말해서 「그만 좀 마시지?」라는 뇌의 경고인 것이다. 그렇지만 몸 상태보다는 입 안에 감도는 알코올의 향을 택하는 애주가들은 이 경고를 무시하기 일쑤다. 당장 술을 마시고 싶다고 이런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 기억을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있던 기억도 버려야 할 지 모른다.

필름끊기는 상태 반복되면 메르니케 포르사코프 증후군 의심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상태가 반복되면 뇌질환 중 하나인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릴 수 있다.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은 과도한 알코올이나 다른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뇌질환으로, 크게 「베르니케 뇌증」과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두 가지 증세로 나눠진다.

초기 급성 상태인 베르니케 뇌증은 안구운동장애, 보행장애 등을 보이는데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태가 발전해 뇌세포가 파괴돼 기억장애가 일어나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이 되면 장기기억이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 「있는」 기억도 사라지게 된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런 점에서 알코올성 기억 장애는 치매와 비슷하다고 한다.
한 두 시간 잊는 것쯤은 괜찮다고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술자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시시콜콜 기억해서 속만 쓰린 것보다는 적당히 잊는 게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뇌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기억을 외면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난 인생이 전부 사라질 수 있다. 새해에는 자신을 위해서 술과의 긴 우정을 조금 잊어보는 것이 어떨까?

(자료제공 : kisti의 과학향기
(
www.ysekisti.net/cs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