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34)/인왕산과 홍제천에 얽힌 두 ‘치마바위’ 사연 (1)
著者 우 원 상
2007-06-04 17:40
폐비신시 첫정 중종 못잊어 붉은치마 내걸어
복숭아 살구밭 많아 ‘논골복숭아’ 이름나
著者 우 원 상

1. 인왕산 치마바위 상사(想思)

조선조 제10대왕 연산군(燕山君~1494-1506)을 몰아낸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에 성공한 박원종 등 공신들은 거사 때 피살된 정적 가운데 중종의 왕비 신(愼)씨의 부친 신수근이 들어있음을 빌미로 삼아 정적의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하여 억지로 중전의 자리를 빼앗고 궁궐 밖 인왕산 밑(옥인동)으로 쫓아냈다.

폐비된 신씨는 13살 때 시집와서 한 살 아래인 신랑 중종과 더불어 7년을 애틋하게 잘 지냈으나 부부간에 금실이 가장 좋을 나이 스물에 더없는 비운을 맞았다. 남편은 최상의 왕관을 얻었으나 그의 왕비는 친정의 가문이 파문(破門)에 이르고 존귀한 중전(中殿)의 자리마저 쫓겨나는 처참한 형극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폐비 신씨는 날이면 날마다 중종임금(1506-1544)을 향한 사모의 정을 잠재울 길이 없어 혹여 님이 보아주시려나하는 애끓는 심정으로 궁궐 안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 너른 바위에 붉은 치마를 아침이면 내다 펴 걸었다가 저녁에 걷어 들이는 일을 거듭하면서 무정한 세월을 달랬다. 중종도 첫 정이 든 신씨를 잊지 못해 경회루(慶會樓)에 자주 올라 인왕산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한숨지었다.
중종이 명나라 사신을 맞으려 어마(御馬)를 타고 무악재를 향해 이 근처를 지날 때면 신씨가 반드시 말죽을 쑤어서 그 길가에 놓아두었다 한다.

그리운 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무엇인들 못하랴마는 500년이 지난 옛 이야기가 이렇게 심금(心琴)을 울릴 줄이야! 궁중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몸담은 임금의 자리인 중종인들 어찌하리오. 두 번이나 새 왕비를 맞아드리고서도 항상 첫 왕비와의 정을 잊지 못해 그리움의 한을 안고 살았다. 그 옥좌(玉座=王位)가 그리도 비정한 것이던가? 그 당시 세간(世間)에서 붉은 치마가 걸린 바위를 「치마바위」라 부르고, 그 애정을 「치마바위 상사(想思)」라 했다.

비련(悲戀)의 왕비, 신씨의 심정을 헤아릴 듯한 시조 두수(二首)를 들어 그 한을 달래본다.

<시조>

가락지 짝을 잃고 

<작자 미상>

가락지 짝을 잃고 네 홀로 날 따르니
네 짝 찾을 제면 나도 님을 보련마는
짝 잃고 그리는 한은 너나 내나
다르랴 (님을 그리는 한풀이)

※ 송림에 눈이 오니 ~정철 지음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꺾어내어 님 계신데 보내고저
님이 보신 후에야 녹아지다 어떠리 (님을 향한 일편단심)

2. 빨래터의 풍속도(風俗圖)를 펼친 홍제천의 치마바위

예전에 홍제동에서 녹번(산골)고개로 가려면 홍제천에 가로 놓인 「서석게다리(홍제교)」라는 돌다리를 건넜었다. 지금의 세운상가 앞에 위치했다.  이 돌다리 아래는 냇물이 여느 곳 보다 맑고 수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겨울에는 뜨듯한 물이 나는 곳도 있어 빨래터로 소문나 있었다.

특히 서석게다리에서 논골로 들어가는 길목(스위스그랜드호텔 옆) 사이에 백련산맥의 한 자락이 멍석처럼 넓고 밋밋하게 내려와 홍제천 냇가에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바위가 치마폭 같이 생겼다 하여 「치마바위」라 불렀다. 그 바위 위에 빨래를 널고 말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바위 건너편 마주보는 곳에도 안산(鞍山)의 능선자락(홍제1동)이 냇가에 와서 급경사(急傾斜)를 이루어 「병풍바위」같았으나 백련산(白蓮山)자락(치마바위)과 손을 맞잡는 형국(形局)이었다. 결국 홍제천 물줄기가 두 산맥의 이어져있는 낮은 곳을 갈라 바위계곡을 만들어 놓고 한가운데로 흘러가는 조화를 부린 곳이라 하겠다.

이곳에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무악재를 넘어 현저동ㆍ천연동 등 원근의 주민들이 빨래터로 모여들었으며 봄ㆍ여름에는 많은 아낙네들의 빨래질로 치마바위가 온통 흰 빨래폭으로 덮이고 머리감고 미역 감는 광경이 생생한 풍속도(風俗圖)를 그렸다.

빨래방망이 소리ㆍ가냘픈 웃음소리ㆍ재깔재깔 주고받는 말소리에 경쾌한 산새소리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맑게 구르는 계곡 물소리와 어울려 화음(和音)을 이룬 가운데 그 메아리의 파장(波長) 또한 무지개처럼 둥글게 선을 그으며 번져나갔으리라. 이렇게 산수 좋은 곳이라 그 바위 주변은 「치마바위골」이라 이름나고 철종(哲宗)임금의 후예들도 이 곳에 들어와 자리잡고 번영을 누려왔다.

고지도(古地圖)에도 이곳을 상암(裳岩:치마바위의 뜻)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예부터 「치마바위」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서 깊은 치마바위골과 연관된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봄이 좋을 성 싶다.

① 치마바위 채석장 ~ 일제시대부터 치마바위산을 깎아내려는 채석장(採石場)이 생겨 (홍제천 건너편에 마주보는 병풍바위도 함께) 해를 거듭할수록 채석한 자리에 공터가 커져갔다. 광복 후 세종문화회관을 건립할 때에도 이 곳의 돌을 건축석재로 썼다. 근래 들어 그 채석장 공터에 현대 아파트를 건축할 당시에도 바로 그 자리의 돌을 깎아 썼다. 건너편 병풍바위 채석장 터도 아파트가 세워져서 치마바위 일대(一帶)가 아파트마을로 변했다. 이러한 연유로 이 바위산을 「돌산」이라 속칭하고 또 채석으로 돈을 벌어준다하여 「돈산」이라고 우스개 소리도 한다.

② 논골 ~ 현 스위스그랜드호텔 뒷동네로서 조선조 중엽(中葉)이전부터 답동(畓洞:논골)이라 한자화(漢字化)한 것으로 미루어 천수답(天水畓)논이 많아 생긴 마을 이름이라 하겠다. 철종(哲宗:1849-1863)임금의 후예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논골이 변음되어 「농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백련산이 양 팔을 벌려 감싸안은 아늑한 산골동네로 안쪽 깊숙이 백련산 기슭에는 복숭아ㆍ살구 밭이 많아 「논골복숭아」로 이름났었다.

③ 벌사래대~논골 앞 홍제천 건너편에 안산에서 길게 뻗어내린 능선을 끼고 백련교와 서대문도서관 언저리를 일원으로 적지 않은 벌판(홍제1동)이 깔려 있었다. 홍제천의 범람과 물줄기의 이동으로 인해 형성된 갯벌을 중심으로 논밭이 경작되던 곳이었다.

「벌사래대」란 뜻은 논ㆍ밭 이랑(경작지)이 벌판처럼 넓게 이루어진 대지를 뜻한다.
고시조(古時調)에 「재 넘어 사래(이랑)긴 밭을 언제 갈려나니…」란 구절을 참작할지니….
④ 대감집 ~ 지금의 스위스그랜드호텔 경내에 철종임금 후예되는 분이 살던 큰 기와집이 있었다. 넓은 정원이 잘 가꾸어지고 기품이 있는 고풍스런 집이었다. 실은 치마바위골을 비롯, 호텔주변 일대를 관장, 관할하던 주인공댁이었다.

단기 4320(1987)년에 개관된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조성하기 위해 그 옛집이 헐리었음이 아쉽다.오늘날 우리사회에 역사적인 옛 정서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으로 변해가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