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32)/민초 쌓인 한 풀던 애오개 본산대 놀이
著者 우 원 상
2007-05-07 10:35
양주별산대, 송파본산대로 명맥 이어져
10년간 애오개 본산대 복원 위한 노력 지속
著者 우 원 상
본산대놀이
민세 안재홍 선생

사연도 많은 애오개(阿峴)에서 맥이 끊겨 사라져 가고 있는 한많은 향토문화재가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것이 바로 중부지방 산대놀이의 본산 「애오개 본산대놀이」다.
이 산대놀이는 한울에 제사(天祭)를 지내는 행사로, 신라 진흥왕(眞興王:540∼576) 때 모내기, 김매기 등 농사를 공동으로 하는 「두레」에서 연유하여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로 이어져 고려 때는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탈가면 놀이춤이 자리잡히고 조선조에서는 궁중에 산대도감 나례청(山臺都監 儺禮廳)을 두고 육조(六曹)의 경축행사가 있을 때, 특히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하는 전례의식으로 산대놀이패를 궁중으로 들게하여 공연케 했다.

그러나, 운영상 큰 비용이 들어 조선 인조 2년(1624)에 이를 폐지하였다. 당시 놀이패들은 신분이 하층 천민(賤民)으로 도성 밖(서대문 밖)에 쫓겨 나와 애오개(능안) 주변에 살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애오개에서는 명절(설, 대보름, 단오 등) 때가 되면 탈춤놀이를 펼쳐 민초들과 함께 쌓인 한을 달래었다.
일제(日帝)는 그것마저 용납치 않았다. 우리의 민속, 풍물문화를 미신으로 몰아치면서 저들의 신사(神社)참배를 강요했다.

1925년 이후 그 맥이 차츰 흐려져 갔다. 그들은 생계가 곤란함에 따라 이저골로 흩어져서 녹번동, 노량진 양주방면으로 옮겨가며 마당굿 들놀이 형식으로 이어가며 양주에서는 「양주 별산대」를 낳고 강남 쪽에서는 「송파산대」를 낳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대표적 본산인 「애오개 본산대」 가면극은 그 맥이 끊겼다. 이 고장에서 300여년동안 뿌리를 내렸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소멸된 것을 재구성해 재현코자 서대문향토사연구회(회장 홍헌일)는 근 10년 이상 백방으로 민속발굴사업을 벌여 왔다.

일부 진척이 되었으나, 서울시 당국의 적극적인 진흥 후원을 갈망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루속히 이 민속문화의 원형복원을 바라마지 않는다.
북아현 능안골의 금화장고개는 60년 전 일제 말기만 해도 호랑이의 전설이 고개마루턱에 꼬리를 늘어뜨릴 만큼 외지고 후미져서 밤에는 넘나들기를 꺼려했던 고개길이었다.

민세 안재홍 선생 청빈한 삶 말해주는 처소 능안골에 위치해
민족운동가들과 대종교 봉교, 8.15 해방후 대표적 논객

서대문쪽에서 능안골로 고개를 넘자마자 첫 머리에 한적하고 자그마한 한옥(기와)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은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기에 국내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등불이 되었던 몇 분 안 되는 어른들 가운데 한 분인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1891∼1965) 선생의 청빈한 처소였다.
필자도 어른들의 은밀한 심부름을 하면서 가끔 미래(장래)에 대한 가슴벅찬 말씀을 듣고 용솟음쳤었다.

아버지 윤섭(允燮)과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안재홍 선생은 1907년 서울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 이상재(李商在)·남궁억(南宮檍)·윤치호(尹致昊) 등의 지도 아래 감화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으로 건너가 토쿄(東京)에 있는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191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했다.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학감으로 있었고,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그는 1919년 이후 20여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8·15광복 후 건국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곧 사퇴했고, 그해 9월 24일 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 26일에는 「한성일보」를 창간, 발행인 겸 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미군정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거쳐 1947년 민정장관을 맡으면서 잠시 신문사를 떠났다가 1950년 5월 다시 사장으로 복귀했으며, 곧바로 제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으나 6·25때 납북됐다.

일제하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그를 조선민족의 사상가라고 부르며 경모했다. 민세 선생은 사학자요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었으며 정치가였다. 우리 상해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활동(1919), 신간회 사건(1927), 재차 임정과 긴밀한 활동(1936), 조선어학회 사건(1942) 등에 연루되어 4차에 걸쳐 무려 8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렀으며, 젊어서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몸담은 적도 있으나 그 후 여러 민족운동가들과 함께 대종교(大倧敎)에 봉교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 그는 「시대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담아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안목, 날카로운 필치로 1920~30년대에 대중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8·15광복 후에는 민주독립국가를 구현하고자 언론과 정계를 뛰어다닌 대표적인 대논객(大論客)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신민족주의 이론을 전개하여 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민족사관을 주장했다.
광복 후, 정치일선에서 민족화합에 힘쓰며, 제2대 국회의원(무소속)에 당선됐으나 6·25사변 으로 납북(1950.9.21)되어 북한에서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1965.3.1로 추정).
저서에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등 많은 옥고(玉稿)를 남겼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옛 금화장 고개를 회상하며 그의 모습을 본다. 만해(萬海 韓龍雲)의 시편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시구를 읊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