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28)/반야사 중건, 지금의 이름 얻은 봉원사
著者 우 원 상
2007-03-22 14:59
백석으로 얽힌 바위, 관음보살이 동쪽 우르른 모습
반야사 주지 찬즙, 바위아래 골짜기에 절 중건
著者 우 원 상

봉원동 하고도 또 깊은 곳이 새절 골짜기이다. 봉원사를 새절이라고 일반인은 불렀다. 언제부터 새절이라고 불렀나?


반야사를 새로 이전, 중건하여 봉원사로 개칭(1748)한 뒤 부터였다. 그러나 봉원사를 현 위치에 앉히게 된 동기는 봉원사 동북편 안산의 경사진 능선에 백석으로 얽히어진 바위가 신비스럽게도 관음보살이 동쪽 하늘을 우러러 합장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져 새 가람터를 찾으려고 노심초사하던 반야사 주지인 찬즙(贊汁)대사의 영험과 조화롭게 잘 부합이 돼서 증암(增巖) 선사와 함께 그 바위 아래 골짜기를 택하여 중건케 된 것이라 한다.


그 바위를 지금도 「관음보살 바위」라 하고 재미있는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근세 봉원사의 두드러진 역사적 사실은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이 이 절에 머물면서 「갑신정변」의 기폭제 구실을 한 것이며, 또한 그 정변은 비단 삼일천하로 끝났다 해도 우리나라 개화기를 싹트게 할 산고(産苦)였다.


가슴 아픈 일화도 많은 정변이었지만, 흐르는 역사선상(歷史線上)의 가치로 보아 실패로 끝난 무위한 사건만은 아니었다. 한 민족의 국가장래를 담보한 개혁의 진통이었다.
그 후에 독립문이 서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강, 민권을 바탕으로 한 자주독립사상이 일어난 것도 개화초기의 산통(産痛)에서 근원한 것이라 하겠다.
이동인이 일본에서 가져온 서양의 신 문물을 소개한 여러 가지 저서중에 「만국사기(萬國史記)」라는 책이 가장 강하게 젊은 개화파의 가슴을 용솟음치게 했다.
장기간 동양을 여행하고 돌아간 이탈리아 출신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양견문록(東洋見聞錄)」이 서양에서 동양에 관한 유일한 진기본이었듯이 이 만국사기도 아주 경이로운 책으로 받아들여졌다.

개화승 이동인, 봉원사 머물며 갑신정변 기폭제 역할
세도가 민영익 집 들른 후 사라져, 수구파에 의한 암살설


개화초기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이동인(1849∼1881)은 어떤 인물인가?
조선 말의 정치가이며 개화의 선구자로서 일찍이 유대치(劉大致)와 만나 개화사상에 눈 떴으며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접촉하여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눈부신 발전에 감명받고 고종 16년(1879)을 전후하여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에 밀항, 경응의숙(慶應義熟)의 후꾸자와(福澤諭吉)와 친교를 맺고 귀국하여 김홍집, 김옥균 등 개화파와 교류하면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종 18년 의무아문의 참모관으로 이원회(李元會)와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군함 구입 비밀교섭, 군비사찰 등으로 일본 외교가에도 자주 등장했으나, 당시의 세도가 민영익의 집에 들렀다가 나온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수구파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다음해(고종 19년=1882) 한미수호조약 체결 때에 이동인이 미리 기초해 두었던 조약초고를 기준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그 인물을 짐작케 한다.


개화기초에 목숨을 걸고 동분서주한 풍운아가 소문없이 사라진 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봉원동이 안산(무악)에서 가장 깊은 마을이라 여기고 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더 가꾸어서 심산유곡의 물소리를 계속 듣도록 해야 한다. 소위 새 세기에는 물 부족 현상이 온 세계를 엄습할 것이라 하며 그 중에 한국도 물부족이 심한 국가 대열에 든다고 내다봤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숲(삼림)이 절대 불가결의 요소요 조건이다.
안산의 옛 언저리(둘레)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반도 남지 않았다고 본다. 제발 더 이상 잠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지 않는 발전은 발전이 아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발전은 미래에 자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미래에 대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