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24)/모화관과 영천에 얽힌 이야기들
著者 우 원 상
2007-01-29 14:32
비를 부르는 ‘도룡용 기우제’ 지내던 모화관
냉천동 쌍우물 ‘과거 급제’ 우물로 유명

이것은 용(龍)이 비를 일으킨다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한 것으로 임금이 모화관을 떠난 뒤에도 헌관(獻官)과 감제관(監祭官)이 의관을 차리고 3일간을 지속했다 한다. 이 민속적 방법은 문안(성안)의 창덕궁, 경회루에서도 행해졌다.

이 모화관과 더불어 영천(靈泉)에 얽힌 마을 어른들의 한이 서린 이야기 한 토막도 그럴듯하다.
영천마을 위쪽에 ‘서대문 형무소’라는 마(魔)의 전당이 있어 헤일 수 없는 많은 독립 애국지사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처참하게 죽어 나갔으며 무악재를 넘으면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널려 있을 뿐 아니라 한양 천도 이후 모화관과 무악재에 아로 새겨진 한맺힌 사연들이 쌓여 한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영혼만이 영험한 샘물로 환생하여 돌아와 샘솟아 오른다. 그래서 영천이란다네!

영천동 주변의 마을은 장안에서 가장 물사정이 좋은 동네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과거에 급제시킨 「쌍우물」이라 해서 유명한 곳이 있었다.
감리교 신학대학 뒷편(냉천동 72번지)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차고 맑은 우물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쌍우물」이라 하였다.

옛날 충청도 어느 고을에 노모를 모시고 있는 효성이 지극한 선비가 있었다. 항상 과거에 낙방하다가 그 해도 상경하는 길가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 서대문 밖 쌍우물에 가서 물을 마시고 가라 일러 그 물을 마시고 과거에 임해 급제하였다.
이 영험함이 널리 퍼져 과거 보는 선비들이 많이 찾아와 유명해졌으며, 궁중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길어다 마셨다 한다.

창천·대신·북아현동

새터말의 맑은 창내(倉川)는 「창천동」이란 이름을 남겼다
광흥창(倉)과 내(川) 더해 창천 지명 창천리 지금보다 구역 넓어

새터말(新村지역)의 주류를 이루는 창내(창천)가 지금은 복개공사로 보이지 않는 반면에 창천동 번화(가)의 밑받침이 되고 있다.
창내의 원류(源流)는 길마재(鞍山∼296m)의 서남쪽(큰 고개 서북편 이대 근방)에서 흐르는 물이 신촌시장에 와 새절(봉원사)에서 내려오는 봉원천(奉元川)을 합류시켜 마포구 창전동(倉前洞)을 지나 서강(西江)으로 흐른다.

이 창내가 창천동이란 땅이름이 되어 조선시대에는 한성부(漢城府) 북부 연희방(延禧坊) 아현3계 창천이라 했고, 일제가 들어서면서 경성부 연희면 창천이라 일컬었으며,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로, 1936년에 다시 경성부(京城府)로 편입시켜 창천정(町)이라 하다가 광복후 창천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의 서대문구에 소속됐다.

신촌시장을 끼고 화려한 요정·위생업소를 많이 끌어안고 있는 서부서울의 요충지일뿐 아니라 연세·이화·서강·홍익 등 여러 대학에 둘러싸인 요람지로서 상아탑의 조광(照光)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싱그러운 새마을(새말)이 됐다.

현시뿐 아니라 옛 조선 초기에도 태조(이성계)가 개경에서 이 고장 안산 남쪽 지역으로 천도하려고 했던 명승지의 노란자위였으며, 그 후 연희궁(延禧宮∼西離宮)과 수경원(綬慶園∼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묘)의 앞동네라 군왕과 백관의 왕래가 많았던 역사 깊은 곳이다. 따라서, 동네 청결하고 예의 바르고 산수 좋은 요지였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유서깊은 「창내」란 하천 이름과 「창천」이란 동명) 어원은 어떤가.

태조가 천도 대상으로 고려했던 명승지 노란자위
연희궁 수경원 앞동네 군왕과 백관 왕래 많아

고려시대의 재정기관(곡창관장)으로서 광흥창(廣興倉)이란 관서가 있었는데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도 조선(漕船∼화물을 실어나르는 옛날 배)이 집결하기 좋은 서강변의 와우산(臥牛山-102m) 기슭에 설치하고 백관의 녹봉(祿俸)과 곡창(穀倉)을 관장했었다.
이 ‘광흥창’ 근방의 내(川)에 창(倉)자를 붙여서 창내(倉川∼나중에 滄川으로 변함)라 하고 창전동(倉前洞), 창천동(倉川洞)이란 마을이름이 생겼다.

그것을 내(河川)니까 삼수변을 붙여 「滄」자로 바뀌어 진 것 까지는 이해가 가나, 어떤 안내책자에 창내를 「倉內」로 표기한 사례는 본뜻을 오류시킬 우려마저 있다고 본다. 우리말의 본원을 생각지 않고 한자에만 매달리는 처사라 하겠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서부 외곽의 순환철도선이 창천동을 통과했다.

용산역에서 공덕, 동막, 서강역을 통과해 신촌시장 서편의 창서초등학교 서쪽을 지나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 못미처에서 경의본선과 연결되어 신촌·능안(북아현)·서소문·서울역으로 돌아가는 철도편이다. 출퇴근 및 등·하교시에 직장인과 학생들이 많이 이용했었다.

연세대 앞 간이역도 있었다. 지금은 서강역에서 신촌역까지의 연결철로는 없어지고, 서강역에서 가좌역으로 바로 직행하는 철로만 남아 화물열차 등 객차가 아닌 열차는 용산역에서 이 철로를 통과해 가좌역에서 경의 본선과 합류한다.

용산-공덕-서강-신촌시장 연결하는 철도, 지금은 사라져
창서초등학교 인근서 경의본선과 연결, 등하교 이용 많아

예전의 창천리는 지금보다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신촌로를 지경으로 서북쪽을 차지하며, 마포구 노고산동과 접했고, 동쪽은 신촌역 입구길 서편 바람산부터 신촌로타리와 신촌 시장을 지나 동교동 로타리에서 우회전해 연희로를 놓고 연남동과 지경을 삼으며, 서북방면은 성산로를 가운데 두고, 연세대와 마주보며 대신동과 손잡고 있다.

창천동 판도내 동편에 우뚝 솟아 바람받이를 하고 있는 바람산은 창천동의 든든한 좌표이다. 동사무소도 그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 바람산은 숲이 울창하고 한갓져서 맹수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창천초등학교가 행정구역이 다른 노고산동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창내에는 물이 깨끗해서 빨래터도 많았고 신촌로타리에서 대현(큰 고개)까지를 잔돌배기(細石埋)라고 불렀다. 이는 대현에서 내려오는 잔돌이 많이 깔려 있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지방문화축제인 신촌문화축제는 대학문화와 어우러져 한껏 다채롭게 발전시켜 새로운 시대에 희망찬 미래를 점지하는 향토문화의 정수로 승화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로 미래로 젊은 웅지(雄志)를 활짝 펼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