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23)/무악재의 별난 이름들
著者 우 원 상
2007-01-11 11:35
호랑이 피해 사람 모아 넘었다 하여 ‘모아재’
호위 군막사 유인막, 통행세 월치전 걷어 민초 울려
著者 우 원 상

이태조가 그 이유를 하문한 즉 정도전이 아뢰기를 이 바위를 성안으로 들여 놓으면 불교가 성하고, 성밖으로 내보내면 유학(儒學)이 흥한다고 했다.

태조는 정도전의 뜻에 찬동하여 성 밖 위치가 되도록 했다. 이에 무학대사는 탄식하기를 『이 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추종하게 되리라』하였다고 전한다. 그 당시(조선조) 억불숭유책(抑佛崇儒策)을 쓴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있음직한 이야기라 하겠다.

오늘의 현저동은 중앙에 독립공원이 넓게 자리잡고 있으나, 이 자리는 말만 들어도 전율(戰慄)하던 마(魔)의 전당 「서대문형무소」가 깔고 있던 자리(터)로써 붉은 벽돌담이 높이 둘러처져 있었으며, 네 귀퉁이에 파수막(把守幕)이 우뚝 서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항일독립운동 파장이 거세어지자 서대문형무소 말고 또 하나의 종속옥인 마포형무소(공덕리)를 지어 두 형무소가 서울 감옥의 쌍벽을 이루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에 경성감옥소라 이름 붙여 세워졌으나, 1912년에는 서대문감옥으로 개칭, 1923년에 서대문형무소, 1946년에 경성형무소, 1961년에 서울 교도소로 했다가 1967년에 서울구치소로 또 바꾸었다. 1987년(11월15일)에는 이 곳을 내놓고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했다.

일제 때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국, 애족 독립투사들이 이 곳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거나 처참한 옥고를 치렀다.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통한의 붉은 벽돌 담이었다.

드디어 단기 4325년(1992)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승화 개장됐다. 옛날 감옥 7동과 사형장 및 지하 여성감옥 등을 보전, 복원하고 전시실, 순국선열 추모탑을 건립해 공원을 조성했으며 탑골(파고다)공원에서 3·1운동기념탑도 이전되어 왔다.

명실공히 순국선열의 얼을 기리며 자주, 자립, 자강의 유구한 역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산 교육의 현장으로 삼아 독립문화의 터전으로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무악재의 별난 이름들

현저동(峴底洞)은 「무악재의 아랫마을」이란 뜻일 뿐 아니라 옛 이름을 「무악골」이라 불렀듯이 역사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무악재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무악재는 현저동과 홍제동의 지경(地境)을 이루고 있는 고개이다. 무악재에 얽힌 이야기는 하도 많아 고개마루를 쉬어 넘는 세월도 한이 없다. 그래서 무악재에 붙여진 별난 이름도 많아 한번 되짚어 보는 것도 감회가 새롭다.

안현(鞍峴:길마재)

무악재의 서쪽 산을 말의 안장(길마) 모양 같다 하여 안산(296m)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 고개이름으로 우리말로는 길마재라 부른다.

모아재

무악 고개마루는 여러 차례 깎아 내리고 넓혀져서 지금은 과히 높아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까마득하게 가파르고 높은 고개였다. 조선 성종(1469∼1494) 때 명나라 사신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하늘이 천길의 한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일천의 군사를 당할 만하다』고 칭송했다. 이렇게 넘기 힘든 고개인 만큼 양 옆에 수목이 우거지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서 인명 피해를 주었다. 그래서 10여명씩 모아서 넘어가게 했으므로 모아재라 했다.

호환(虎患) 때문에 현저동에 유인막(留人幕)이라는 군막사가 생겼는데, 그 곳에 고개넘는 행인을 모았다가 열사람이 차면 이들을 호위하여 넘겨 주었다. 그러나 그 적에도 그 나름의 부조리가 있어서 군사들이 행인을 호송한다는 명목으로 월치전(越峙錢)이라는 통행료를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이 통행료 강제징수가 극심해서 민초들은 「무악재 호랑이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예나 이제나 그놈의 부정 부조리는 곱사리끼듯 이골이 난 것이 아닌지?

사현(沙峴)

무악재 너머 홍제천은 모래가 많은 개천이라서 원래 토박이 이름은 「모래내」라 하고, 한자로는 사천(沙川)이라 했다. 이 내의 모랫바람이 자주 날려 오는 고개라 하여 사현(모래고개)이라고도 했다.

추모현(追慕峴)

조선조 영조대왕(1724∼1776)이 부왕인 숙종의 능이 있는 명릉(明陵)을 이 무악재에서 바라보면서 부왕을 그리워했다 하여 일명 추모재라고도 했다.

무학현(無學峴), 無鶴峴)

조선초 태조(이성계)가 고려 말엽에 일개 무장(武將)으로 있을 때 서까래 꿈의 해몽으로 왕이 될 것을 예언한 바가 있어 총애를 받았던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대동하고 한양천도를 위해 이 곳을 두루 살펴보고 도읍을 정하게 됐다 해서 무학현이라 불렀다. 오늘날 무악재라 부르게 된 것은 무학현에서 변음되었다고도 한다. 안산을 모악 또는 무악(母岳)이라 호칭한 데서 전이됐다고 본다.

모악현(母岳峴)

풍수지리설에 의해 서울의 주봉인 북한산(삼각산 837m)의 인수봉(810m)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세로 부아악(負兒岳)라 하고, 이것을 막기 위해 안산을 어머니산 무악(毋岳 또는 모악)이라 부르게 하고 서쪽 아현(阿峴:애오개)을 병시현(餠市峴)이라 불러, 나가는 아이에게 떡을 주어 달래 머무르게 한다 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벌을 주겠다고 약수동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 했다.

봉화재

안산 봉화대(봉수대)가 설치돼 있어 봉화터가 있는 고개라는 뜻의 한 이름이다.

기봉(崎峰)

도성 서편에 있어 북한산에서 갈라진 봉우리라는 뜻에서 기봉이라 했다. 조선 말의 동국여비지고(東國輿地備攷)에도 「모악을 「안현」이라 하기도 하고 「기봉」이라 하기도 한다」라고 표기된 것으로 치면 봉우리(산)와 고개를 얼버무려 일컬었음도 볼 수 있다.

모화관과 영천에 얽힌 이야기들

농경(農耕)을 중시하던 시대는 농사철에 제때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나라와 민심도 속이 타 들어가 조바심을 쳤다.

비를 기다리다 지친 민심은 제 고장마다 기우제(祈雨祭)의 불꽃을 일구었다. 나라에서도 임금이 모화관에 나와 한울에 기우제를 지냈다.

그 기우제에 민속행사가 하나 곁들여졌다. 도룡용을 물독에 넣고 푸른 옷을 입은 수십명의 아동들이 버드나무가지로 물독을 치면서 『도룡용아! 도룡용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 비를 내리게 하면 너를 놓아 주겠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게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