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22) / 고개 밑 동네 현저동
sdmnews
2006-12-29 16:43
역사·독립문화의 텃밭, 현저동
무악재, 한양에서 대륙으로 통하는 유일 역로
著者 우 원 상

현저동(峴底洞) 하면 고개 밑 동네라는 뜻으로 무악재의 바로 아래동네를 일컫는 이름이다.
무악재는 한양에서 관서(關西)지방을 거쳐 대륙으로 통하는 유일한 역로(驛路)의 첫번째 고개로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저동 역시 무악재와 함께 역사적인 애환을 같이 엮어 왔다.

이 현저동은 조선조 때에는 중국 사신이 머물던 마을이라 해서 모화현(慕華峴)이라 불렀다. 사대모화(事大慕華)사상에 젖은 표현이라 하겠다. 이를 일제때는 현저정(町)이라는 일본식 지명으로 바꿨다가 광복 후에 현저동으로 바로 잡았다.
예전에는 의주로 건너편, 현재 종로구에 편입돼 있는 무악동(母岳洞)과 현 성산고가도로변까지를 현저동에 포함시켰었다.

6·25동란 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1955년 4월에 1,2,3동으로 나뉘어 1동은 의주로 동쪽(인왕산 밑 무악동) 지역, 2동은 옛 전차 종점까지의 도로변과 독립문 서쪽까지, 3동은 안산과 무악재 밑(현저 산5번지) 서대문구의회 위쪽 마을이었다.

1975년 10월 1일에는 현저1동(무악동)이 종로구로 넘어가고 성산로 건설로 1978년 10월 10일에 영천동 일부가 현저동에 편입되었으나 1999년 10월 1일부로 현저동 사무소를 폐쇄하여 천연동사무소에 통합시켰다. 따라서 천연동사무소는 냉천·천연·옥천·영천·현저동 등 5개동을 행정관할하고 있다.
현저동 주요 명소는 안산을 배경에 두고 인왕산을 앞에 보며 의주로를 앞 띠줄로 치고 있는 독립문과 독립공원(서대문형무소 일부∼역사 교육현장 포함)을 비롯한 독립문극동아파트, 독립문파크빌아파트, 서대문구의회, 한성과학고등학교… 등 웅자(雄姿)한 역사문화의 도시로, 독립문화의 텃밭을 형성하고 있는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현저동은 역사 깊은 정서와 이야기거리가 풍요로운 고장이다.
우선 옛 골(마을)들의 이름을 더듬어 본다.

악박골
영천약수터로 소개한 바 있지만 길마재(안산) 기슭에 병에 효험이 좋다고 도성 안에까지 소문이 난 「악박골 약수터」가 있는 마을이다. 나중에 영험한 약수로 유명해지면서 영천(靈泉) 약수로 존칭되어 영천동명까지 낳게 하고 독립문 일대를 영천지역이라 부르게 된 진원지(震源地)이다. 이러한 자연약수가 현대 개발에 밀려 없어져가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비단 약수뿐이겠는가!

동골
무악재와 안산 밑 서대문구의회 사이의 마을을 일컬으며 일제때 서대문변전소 뒤 도성안 분뇨를 분뇨마차(통을 장착한)로 모아다가 저장하던 분뇨탱크가 있던 곳이라서 자연스레 생겨난 이름이다. 그 곳 번지수대로 「산5번지」라고도 불렀다.

떡골목
독립문에서 남서쪽으로 약 70m 지점에 1940년 이전부터 방앗간과 떡집이 들어서면서 생긴 마을로 1970년초 굴레방다리 근방에 전통을 자랑하는 떡집들이 대거 이사해 오면서 부르게 된 골목 이름으로 영천시장과 연계돼 있다.

봉화둑
안산 꼭대기에 설치된 봉화대(봉수대:烽燧臺)를 일반 민초들은 봉화둑(뚝)이라고 불렀다. 이 봉수제도는 기록상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고대부터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그 봉화 방법은 낮에는 연기로 하고 밤에는 횃불로 변방의 사정을 알렸으며, 연기를 피울 때는 하늘로 똑바로 올리기 위해 여우똥이나 싸리나무를 썼다고 전해진다. 평상시에는 횃불을 한번 들면 무사하다는 알림이고, 두번 들면 적이 나타났다고 알리는 정보요, 세번 들면 적이 국경까지 온 것이고 네번 들면 적이 국경을 범한 것이며 다섯번 들면 적과 접전함을 알리는 급보였다 한다.
이 봉수대의 복무 인원은 10인이 한 단위대로 편성되어 봉화간(烽火干) 5인, 화포군(火砲軍) 2인, 망군(望軍:망보는 이) 2인, 감고(監考:감독) 1인으로, 10일씩 근무했다 한다.

변방의 정황을 알리는
안산 봉수대

왕궁과 관아(官衙) 바로 저긴데
성곽의 엄한 수비(守備)
말 안장을 의지했네

변방의 소식이
저물게 들어오는데,
날마다 평안무사(平安無事)한다네

∼광해군 때 문인 이민구(李敏求)의 시∼

바위 아래 동네 무악골
아들 낳는 말바위, 부인 잃은 남편 ‘말머리 잘랐다’ 구전
도성 밖 밀려난 선바위 ‘억불숭유’의 상징물

예전에는 무악재 아랫말을 ‘무악골’이라 불렀다. 오늘의 현저동과 무악동(종로구)을 아우른 동네를 일컬었다. 나무를 진 지게꾼과 우마차(牛馬車)로 고개를 넘던 나무꾼들이나 행인들이 쉬어가던 마을로서 한길 옆에는 주막집과 국밥집 들이 모여있었다.

1750년대에 그려진 도성도(都城圖)에는 무악골을 바위 아래동네라는 뜻으로 악암동(岳岩洞)이라고 표시했음을 본다.
무악골은 안산과 인왕산의 가파른 기암절벽을 등지고 있어서 기이한 형태를 한 바위들에 얽힌 이야기도 진진하다. 한 예로 현저동의 「말바위」(안산 봉화뚝 바로 아래 절벽에 거북이 모양을 한 바위 위에 말이 앉아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바위를 말바위, 또 말목바위, 말뚝바위라고 한다)에 서린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솔깃하다.

이 바위를 타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아낙네들이 기도드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허리에 베바를 동이고 한쪽에서는 그 밧줄을 붙들게 한 뒤 말바위를 힘들게 타는 풍속이 있었는데, 윤년(閏年)마다 사람이 꼭 한명씩 떨어져 죽었다는 소문처럼 여기에서 부인을 잃은 한 남편이 한이 맺혀 그 말머리를 잘라 버렸다 한다. 그래서 머리없는 말바위가 됐다 전한다.

또 「선바위(禪岩)」 이야기가 있다. 현 무악동(종로구)의 국사당 위 인왕산 중턱에 우뚝 서 있는 한 바위가 있는데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조선조가 한양 천도(遷都)를 위해 도성을 쌓을 때 태조(이성계)가 인왕산 축성 현장을 관찰 독려하던 차에 무학대사는 그 바위를 성안으로 들여 보내 쌓으려 하고 정도전은 성 밖으로 내보내 쌓아야 한다고 해 두 의견이 상충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