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동(靈泉洞)의 조선조 때, 옛 이름은 관전동(館前洞)·관후동(館後洞)의 일부, 또 장원정동(壯元亭洞) 일부였다 한다.
관전동·관후동은 모화관(慕華館)의 앞동네(관앞골)·뒷동네(관뒷골)란 뜻이고 장원정동은 모화관에서 무사를 선발할 때 장원한 무사들을 특별히 대접하던 「장원정」이어서 유래한 것이다.
일제는 이 곳을 관동(館洞)이라고 개칭(1914), 모화관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 후 「악박골약수」가 「영천약수」로 유명해져서 이 지역 일대를 자연스레 영천지구로 불렀다. 이에 연유해 광복후 관동을 영천동으로 개칭, 법정지명으로 승격했다.
1978년 성산대로가 개통되면서 독립문이 있는 쪽(옛 떡골목지역)은 현저동으로 넘기고 영천시장 쪽만 남게 되었다. 시장 뒤 쪽에는 삼호아파트단지가 새로 크게 조성되어 자못 활기를 띠고 있다.
조선 자존심 500년 손상시킨
사대모화사건의 ‘모화관’
민족의 한이 서렸던 모화관(慕華館)은 조선의 자존심을 장장 500년간이나 손상시킨 사대모화(事大慕華)의 전당으로 굴욕적이고 저주스런 곳이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로타리 부근(영천동 69번지)였다.
조선시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누각으로 태종 7년(1407), 송도(松都∼개성)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무악재 아래에 건립, 처음에는 모화루(樓)라 명명했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그 남쪽에 연못을 만들었다.
세종 11년(1429)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이라 개칭했다. 명·청의 사신이 올 때는 2품(二品∼아홉 품계중 2번째)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명·청의 외국사신을 멀리 나가서 영접하는 내국사신)를 의주(義州)까지 보내서 맞이하게 하고, 선위사(宣慰使)를 중간 다섯 곳에 보내어 영접하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했다. 서울에 당도하면 조선의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미리 모화관에 나아가 대기하다가 명·청 사신이 도착하면 재배(再拜)의 예(禮)를 행했다. 이 사신이 돌아갈 때에도 마찬가지로 재배례를 갖추었다.
이 모화제도는 청일전쟁(淸日戰爭∼1894∼5) 이후 폐지되고, 고종 33년(1896)에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를 조직, 모화관을 그 사무실로 쓰면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건립(1896)하여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이름붙여 독립협회의 회관으로 사용하며 독립·자주정신 선양의 요람으로 삼았다. 또 「독립신문」을 발간했던 곳이기도 하다. 참으로 혁명적인 대변혁이었다.
영천지구 국학대학,독립문화
텃밭 한 몫
광복 전후 민초들의 복마전
영천지구 국학진흥 위한 대학 입성 환영
광복 전후만 해도 영천하면 전차(電車) 또는 버스 종점을 떠올리고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를 연상시키는 지역 이름으로 빈한한 민초들이 몰려사는 지역으로 부각됐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독립문 지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하철 독립문역이 생기고 복마전(伏魔殿)이었던 서대문형무소가 헐려 독립공원이 조성되었으며 형무소의 일부를 남겨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등장시켰고,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잇는 고가도로가 오늘의 현상을 가늠하고 주변에는 아파트 단지가 안산·인왕산을 배경으로 즐비하게 들어서서 아주 쾌적한 독립문화의 터전으로 변했다.
또, 일제에서 해방이 되자 우리 임시정부와 대종교(大倧敎)를 비롯한 해외 항일 독립운동 세력이 대거 환국하면서 홍익·단국·국학·신흥대학(신흥무관학교 후신)이 연이어 세워져 사대식민교육과 사상을 청산하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특히, 영천지구에 국학진흥을 위한 국학대학이 들어선 것도 독립문화의 텃밭을 가꾸는데 크게 한 몫을 했다.
근세에 와서 국학이란 한국학을 진흥함으로써 한국얼을 고취시키려고 한 학자들이 많았다.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신채호(申采浩), 정인보(鄭寅普) 선생 등이었으며, 특히 국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선구자는 정인보 선생이었다.
광복과 더불어 국학 전문학교로 발족, 초대 이사장에 정의채(鄭義采), 초대교장에는 정열모(鄭烈模)선생이 취임, 단기 4280년(1947)에 대학으로 승격했으며 2대 교장에 정인보 선생, 3대 교장에 윤기섭(尹琦燮)선생 등이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위에 열거한 인물들이 모두 대종교인(大倧敎人)이었다는 것이다. 이 국학대학은 1966년에 제17기 졸업생을 배출하고 우석(友石)대학에 병합되었다.
광복 직후 어떤 잡지에 글쓴이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100년 후의 서울」이란 글에서 영천지역이 현재는 성 밖 후진 곳으로 되어 있지만, 100년 뒤에는 시내 한복판이 될 것이며, 국학대학은 저 수색 같은 먼 외곽으로 밀려나고 현재 한적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연세대학이나 이화여대도 시정 한가운데로 변모할 것이라 했다.
서울 외곽을 싸고 있는 한강(漢江)도 청계천 같이 서울을 가로지르는 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이 예측의 템포가 빨라져서 50년도 채 안돼 적중했음을 보면 오늘과 어제의 격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금석지탄(今昔之歎)이라고나 할까!
예전에 영천의 밤은 어두컴컴했다. 영천에서 무악재를 넘겨다 보면 심산유곡(深山幽谷) 사이로 하늘의 별들이 아롱새겨져 있고, 무악재 양 옆 인왕·안산이 시커멓게 우뚝 솟아 낮에 보다 훨씬 높아 보이며 부엉새가 울고 서로 손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장순하(張諄河) 시인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두 산을 쳐다보며 그런 관계를 노래했다.
… 전략 …
북악과 인왕산은
어찌 게서 사는 걸까
하고한 사연이 쌓여
말은 이미 묻혔다.
예사 돌아앉아
남남처럼 하던 그들
한밤 이슥하여
도란도란 깨 쏟으면
나는 또 꾀잠이 들어
귀를 반만 세운다.
이 시의 내면 정서는 지형상으로 보면 북악과 인왕 사이보다는 인왕과 안산의 관계에 더 적절한 표현으로 느껴진다. 인왕·안산을 볼 때마다 다시 읊조려 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