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정에서 천연지를 노래한 시
천연정 올라서 무더위를 피하는데
밤늦게 연꽃 구경하다 정자 위에 잠이 든다네
연륜(年輪) 따라 퍼진 큰 가짓잎 널다란히 둘러섰고
한 없이 맑은 향기 줄기마다 엉기었네
못 속에 잠긴 저 달은 넓은 바다에도 통할 것이
종소리 멀리서 들리고 만호(萬戶長安)엔 등불이 밝구나.
호상에서 놀던 범충(范蟲), 서시(西施) 지금은 어디갔나
먼 산골에 새벽닭 우니 마시던 술이 얼음 같이 차구나
∼고종(高宗朝∼1860∼1907) 때 시인 황록비(黃綠比)∼
반송정에서 먼 길 떠나는 친구를 보내며
수레일산 구름처름 모여 먼 길손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 길가에 술도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 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닯은 소리 소리 간장(肝腸)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리길 멀어지는데
외줄기 연기에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세조(世祖) 때의 문인 강희맹(姜希孟)의 시∼
천연동과 충무로 2가 사이
‘찬우물골’ 토박이 이름
약수로도 유명, 냉정동, 냉동,
냉천동으로 이름바뀌어
냉천동(冷泉洞)은 천연동과 충무로 2가 사이에 위치하여 ‘찬우물골’이란 토박이 이름에서 붙여진 동명이다. 무악(안산) 지맥(支脈)의 하나인 금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약수로 이름난 곳이었다. 경기대학교 북쪽지역(냉천동 74번지)에 있던 찬우물에 연유하여 냉정동(冷井洞), 냉동(冷洞), 냉천동으로 이름하며 내려왔다. 1975년 10월 1일부로 자체 동사무소가 폐쇄되어 천연동사무소 관할로 이관됐다. 조선조 때 행정구역은 천연동, 옥천동, 영천동, 현저동과 함께 서부 반송방(盤松坊) 지하계(地下契)에 속했었다.
동내에 감리교신학대학이 뿌리내린 지 오래 돼서 더욱 유서깊다. 이 대학은 단기 4238년(1905)에 미국 북감리교회 한국선교부에서 설립하였으며, 이 감리교회는 동대학설립 20년전 (1985년)부터 배재학당, 이화학당 감리교병원 등을 세우고 선교 활동을 본격화했다.
맑은 물 폭포지어 흐르던 옥폭동, 옥천정, 옥천동으로 개칭
냉천, 천연, 영천동과 더불어 산수좋은 이름 타고나
옆동네 옥천동(玉泉洞)은 만초천(蔓草川) 상류를 이룬 맑은 물이 폭포지어 흐르는 곳에 위치한 동리라서 옥폭동(玉瀑洞)이라 하던 것이 일제때에 옥천정(玉泉町)이라 했다가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에 옥천동(洞)으로 개칭됐다. 한때(1955년)는 석교동(石橋洞)사무소에서 관할하다 천연동사무소로 이관된 것이다.
이 옥천동 역시 냉천, 천연, 영천동과 더불어 산수좋은 이름을 타고났지만, 조선조가 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遷都)하면서 영욕(榮辱)이 점철된 무악재로 부터 돈의문(敦義門∼西大門)과 소의문(昭義門∼西小門)까지를 만초천으로 의주로와 나란히 길게 엮어내린 역사 깊은 고장에 속한다.
특히, 개화기(開化期)를 기점으로 일제 침탈의 암흑시기를 겪으면서 민족의 수난사와 독립문화의 텃밭을 일구는데 일역이 됐다. 또한, 조선조 경기감영(京畿監營∼현 적십자병원 자리)을 앞자락에 모신 감영 앞 여러 동네 중 하나다. 이 「감영 앞」을 일반 민초들은 「개명 앞」이라고 부르면서 지금의 서대문로타리를 중심으로 한 주위 일원을 지칭했다.
안산, 인왕산서 스르던 냇물 영천시장 흘러
영천약수 유명해 무악재 안 골짜기 일대 ‘영천지구’ 호칭
영천동(靈泉洞)은 병약한 사람에게 치유 효험이 좋다고 하여 소문난 악박골 약수를 「영천 약수」라 하였으며, 이 약수로 인해 무악재 안 골짜기 일대(독립문일대)를 「영천」지구로 호칭했다. 일제때에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형무소 앞 전차(電車) 종점을 「영천」이라 칭하며 전차에도 「영천행」으로 표시했다. 광복 후(1968년) 전차노선이 없어질 때까지도 그랬다.
영천동 역시 금화산을 배경으로 하고 북쪽에 무악재를 지경으로 하는 현저동 독립공원과 접해 있으며 남으로 옥천동을 이웃하고 있다. 안산과 인왕산에서 근원한 냇물이 영천시장을 지나 의주로를 건너 적십자병원 앞으로 해서 서대문로타리의 농협빌딩 뒤로 흐르고 있으나, 1966년에 복개공사로 현재는 하천의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요즘 나오는 도시지도에 복개된 하천의 표시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어떻게 하든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터인데…) 영천시장은 모화관(摹華館)이 있던 지역이라 모화관시장이라고도 불렀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