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19)/돌아오지 못하는 눈물의 다리 누교(淚橋)
著者 우 원 상
2006-11-21 10:51
서소문공원 옛 수산시장 갯밭형장 천주교도 처형 너무 슬퍼 흘러내리지 못한 통한의 다리(橋)
著者 우 원 상

헌다리(흙다리) 옆 합동(蛤洞∼조갯골)의 배가 드나들던 농포(農浦) 부근(현, 대왕빌딩과 서소문 공원∼옛 수산시장)에는 근세 들어 수심(水深)이 낮아져 뱃길은 막혔어도 만초천(蔓草川) 갯밭에 서소문 형장(刑場)이 있어 참터(斬趾)로 불리었으며 조선조 말엽 단기 4138년(1805)에 많은 천주교도들이 대량으로 처형을 당했던 장소의 하나로 이름나 있다. 현재 서소문 공원에는 천주교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천주교 박해 때 흘린 눈물의 다리 누교
죽는 이 고통 덜어달라 주는 뇌물 「속참행하(速斬行下)」

소위 중죄인(천주교도)을 사형장으로 압송하는 모습은 처참했다. 소달구지에 십자가를 세워 두 팔을 펴 좌우에 묶고 머리카락은 풀어 십자가 기둥에 묶었으며 발에는 나무토막을 괴어 압송했다 한다.

서소문을 나온 소달구지는 비탈길을 터덜거리며 급히 내려갈 때 처형수(處刑囚)가 딛고 있는 나무 발판을 차버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이미 반죽음이 되어 형장에 이른다. 처형수를 형리(刑吏) 앞에 꿇어 앉힌 다음 죄안(罪案∼범죄사건 기록)을 읽어 내린다. 그 앞에는 참수(斬首)대가 대기하고 있다.

그 형장에는 50보 사방으로 장막이 쳐져서 바깥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격리되어 있다.
마침내 묵직한 참도(斬刀∼칼)를 든 망나니가 흉물스런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망나니는 대체로 집행을 유예받은 사형수로 정직업명은 행형쇄장(行刑鎖匠)이요, 회자수(사형집행을 담당하는 천한 직업), 또는 희희덕거리며 칼을 놀린다 하여 「희광(戱狂)」이라고도 한다.

망나니가 칼을 휘두르면서 춤을 추며 장막 둘레를 돌면 죄인의 가족, 친지들은 돈을 던져 행하(行下)라 불리는 팁을 준다.
조금이라도 죽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단칼에 죽여 달라는 뜻으로 주는 뇌물이라 하여 속참행하(速斬行下)라 하였다.
서소문길에서 형장으로 통하는 크지 않은 한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다리 이름이 눈물의 다리 누교(淚橋)라 했다.

이를 한문으로 표기 할 때는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흘러내래지 못한 눈물의 다리라는 뜻으로 그칠저(막을저∼沮)자와 비슷한 누교(橋)라고도 썼다. (이규태의 「600년 서울」을 참고함)
그 다리를 건넜다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천추에 한을 남긴 다리였다.
이 밖에도 충정로에는 순국의 가슴 아픈 한이 많이 남아 있다.

천연지, 서울 서편 연못,  서지(西池)라 불러
정자서 치르던 귀빈 환영·환송의식 뒷날 모화관으로 옮겨

천연동(天然洞) 하면 이웃 동네 냉천동(冷泉洞), 옥천동(玉泉洞), 영천동(靈泉洞)과 함께 안산(鞍山)과 금화산(金華山) 줄기를 배경으로 한 산 좋고 물 맑은 곳이었다. 그 동네 이름들만 보더라도 하나 같이 물 좋기로 이름난 곳이니 인심 좋고 살기도 좋은 고장이었으리라. 명실공히 약수가 많기로 소문난 곳들이다.

이렇게 산수 좋은 고장 앞 들에 안산·무악재·인왕산의 이 골 저 골 물줄기를 모아 젖줄기처럼 흐르는 냇물이 있었으니 물이 흔하고 맑기로 유명한 만초천(蔓草川~旭川)의 상류(上流)를 이루었다. 이 냇물은 서대문 네거리를 지나 서소문 앞 옛 농포(農浦~배가 드나들었다는 합동)에 머물렀다가 청파동, 원효로 지역을 거쳐 한강(용산)으로 합류한다. (지금은 모두 복개 되어 물줄기를 찾아볼 수도 없지만).

현재의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천연적(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연못 천연지(天然池)가 있었는데 그 둘레가 넓어 150여보나 되고 수심 또한 깊었다 한다. 이 못이 서울 서부에 위치한다 하여 서편연못 서지(西池)라고도 하였다. 그 천연지 근처(현 동명여중 자리)에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정자가 조선 영조 17년(1741)에 세워졌으며 그 앞에 우산같이 옆으로 펴져 있는 반송(盤松)이라는 큰 소나무가 서 있어서 천연정을 반송정(亭)이라고도 하고 반송지(池)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그 반송이란 소나무는 고려시대 어느 임금이 국토를 순행(巡幸)하던 중 소나기를 만나 이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해 갔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이만하면 천연동이란 동명의 연유도 자명(自明)해 졌다.

천연정(반송정)은 무악재(의주로)를 넘나드는 관원 또는 내외 귀빈객을 환영 또는 환송하는 연회 행사장으로 활용하던 정자였으나, 연회행사가 모화관(慕華館)으로 옮겨지고 조선조 말엽에는 한때 경기중군영(京畿中軍營)이 자리잡았으며 고종 17년(1879)에 일본초대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이곳을 일본공사관으로 사용하다가 고종 20년(1882) 임오군란(壬午軍亂)시에 군민(軍民)의 습격을 받아 소실되고 화방 일본공사는 인천을 통해 본국으로 도망쳤었다.

이 천연정에는 부대건물(附帶建物)이 있어서 일반에서는 청수관(淸水館)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천연지는 서지(西池)라 해서 1720년대에 제작된 도성도(都城圖)를 비롯한 여러 지도에 표시되었을 뿐 아니라 남대문 밖 남쪽에 남지(南池), 창경궁 동편 연동(蓮洞~蓮池洞)에 동지(東池)도 있었다.
재미로 듣는 이야기에 「서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西人)이 득세하고 「동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동인(東人)이 득세하였다고 한다.
예나 이제나 그 당파 다툼의 작태에서 나옴직한 넌센스렷다.

이판서 산곳 이판동, 돌다리 유래 석교동으로 불리기도

조선조 때의 기록에 천연동은 이판동(李判洞)과 석교동(石橋洞)의 일부라 하였는데 「이판동」은 이 지역에 이판서(李判書)가 살았다 하여 유래되었을 것이고 「석교동」은 지금의 금화초등학교 북동쪽 의주로변에 있었던 돌다리에서 연유했다.

천연동 지경(地境)은 금화산을 등에 두고 오른편(남쪽)에 충정로 2가와 냉천동에 접하고 왼편(북쪽)에 옥천동과 영천동을 손잡고 앞에는 의주로를 가운데 놓고 종로구(평동, 송월동, 교남동)와 마주 보고 있다. 동내에는 동사무소를 위시해서 금화아파트와 금화초등학교, 동명여자중학교를 품에 안고 있는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1955년에 옥천동과 함께 석교동사무소에 속했다가1973년에 천연동사무소로 다시 환원하고 1975년 10월 1일부터 냉천동, 옥천동, 영천동의 동사무를 함께 도맡아 천연동사무소 관할하에 두고 매우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