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蛤洞∼조갯골)의 옛 자연 촌락으로 「미나리골」이 있었다. 지금의 합동, 미근동, 의주로 일대에 물좋고 맛좋은 미나리밭이 물결치며 널리 분포돼 있어서 생긴 마을 이름이었다.
옛 합동에 한림동(翰林洞)이라는 자연마을도 있었는데 현재 중림동에 흡수된 곳으로 조선조 초에 무학대사가 명당이라고 정해 주어 만리재(萬里峴)에 자리잡아 살던 이정보 문신(文臣)의 6세손 이정암의 3형제가 모두 한림학사가 되어 불리워진 동네 이름이다.
△조개산
현재 프랑스 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합동 30번지)을 부르던 자연이름으로 그 아래 농포(農浦∼서소문 중앙시장=현재 서소문 공원)의 조갯도가(都家)에서 나온 조개 껍데기가 이 언덕에 누적되어 생긴 속칭이리라.
프랑스 대사관은 한일병탄(韓日倂呑) 직후 단기 4243년(1910), 10월 1일에 이 곳으로 이전해 왔다. 프랑스는 1866년에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고 종로 관수동 126번지에 공관(한옥)을 정했다. 그 후 협소하다는 구실로 1889년 정동(창덕여중 자리)으로 옮겼으나 한일병탄이 되자 본국으로 철수했다가 일제가 한국에 세력을 굳히자 영사관으로 격을 낮추어 현 위치로 복귀했다.
△잔돌배기고개
합동에서 애오개로 넘어가는 고개에 잔돌이 많이 박혀 있는 데서 연유하였다. (잔돌배기란 곳은 전국에 수없이 많다. 가깝게로는 큰고개(大峴)에서 신촌로타리까지도 잔돌배기라고 한다.)
△차자리(車子里)
애오개 마루턱에 있던 마을로 조선조 선조 때의 문장가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살았기에 붙여진 것이다.
△형제우물골(兄弟井洞)
지하철 충정로역 부근의 충정로 3가 300번지에 있던 형제우물이 유명한 데서 유래된 옛 마을이다.
△유기전골
조선조 초부터 놋그릇 파는 상점 또는 놋그릇 공장이 미나리골 위쪽에 모여 있었으며, 또 애오개 넘어 굴레방다리(북아현)쪽으로 내려가는 애오개길에도 모여 있어서 고개 전후 양쪽에 유기전골 혹은 바리전(鉢里廛)이라 하여 한 상공업권에 들어 있었다.
△헌다리
합동 9번지 남쪽에 나무다리를 놓고 그 위에 흙으로 엎어 「흙다리」라고 하던 것이 전음되어 헌다리로 변하고 한자로 파교(把橋)라 적었다. 다리 건너 미동초등학교 마당 근처에 미근간이역(또는 미동간이역)이 있었다. 이 역은 서울역-능안-신촌-서강-공덕-용산코스로 순환철도가 운행하던 시절에 활용했던 간이역이다.
△초리우물골
전에 언급한 바 있는 물맛 좋고 물줄기가 항상 넘쳐 흘러서 꼬리우물, 초리우물로 이름난 동네(미정동∼尾井洞)이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원조 ‘서소문 중앙시장’
옛 서소문 밖 농포(農浦)는 농수산물 집산지
만리재 초입 30년 전 이름난 어물도가
지금의 서소문 공원 지역 일대는 1975년 이전까지 합동(蛤洞)에 속했다가 중구의 중림동으로 넘겨진 곳으로 서울의 대표적 어물시장인 서소문 중앙시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중앙시장은 1975년 초에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옮겨졌지만, 수산물 말고도 청과류도 거래되어 성시(盛市)를 이루었었다.
조선조 때에는 만초천(蔓草川)으로 배가 들어와 농수산물을 부리던 선착장이었다 한다. 그래서 농포(農浦)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무악재에서 내려오는 만초천은 물이 많고 하상(河床)이 깊은 데다가 강화만(江華灣) 밀물(滿潮)의 영향을 받아 마포 용산(만초천 입구)까지 한강수위가 높아지는 때를 이용해 작은 배들이 냇물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배가 드나들던 하천이 상류에서 밀려 내려오는 토사(土砂)로 인해 냇물이 줄고 강바닥이 낮아져서 배의 출입이 막힌 곳은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기 때문에 농포의 경우도 옛날에 배의 출입이 있었다고 본다.
이 곳 농포 근처에는 조선조 초부터 성밖의 외어물전(外魚物廛)이라는 장시(場市)가 섰다.
성안의 「내어물전」은 종로 청진동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만리재 초입에는 30년 전만 해도 이름난 어물도가(都家)가 있었음을 미루어보면 옛 어물전의 역사적 자취를 뒷받침한다 하겠다.
서소문 밖은 이외에도 상미전(上米廛), 하미전(下米廛) 등의 싸전이 줄을 이었었다.
서소문 밖 칠패시장 자리 서울서 가장 큰 상업중심지 발전
서소문(昭義門)과 남대문(崇禮門)밖은 농포가 기점이 되어 의주로 2가, 서소문 네거리 일대에 칠패시장(七牌市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칠패시장은 난전(亂廛)시장의 하나로 서울에서 가장 큰 상업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수산어물, 미곡, 포목 등 각종 생활용품이 총망라 해서 거래되었다.
조선조 중엽부터 중국(청국) 물품이 거래되었으며 말엽에는 청국상인(중국상인)들이 들어와서 국제시장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남대문 시장은 옛 칠패시장의 역할을 이어받고 있다 하겠다.
서소문에서 과히 멀지 않은 애오개 너머에 「농포」와 비슷한 곳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아현초등학교 아래쪽에 선통물천(先通物川)장터였다.
삼개(마포)항에 많은 물건이 들어오면 애오개 쪽에서 흐르는 개천(금화산에서 발원한 놋개천∼綠溪川) 하류로 먼저 거슬러 올라와 아현동 근처에 풀면, 다시 애오개를 넘어 장안으로 반입되었다 한다. 그래서 물건이 먼저 유통(流通)하는 하천이라는 뜻으로 선통물천(先通物川)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 물건이 장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현지역에 일부를 풀고 서소문 밖 큰 장터(칠패시장 등)를 거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