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16)/100년전 서대문역,지금의 경찰청
著者 우 원 상
2006-10-31 11:05
이화여고 내 큰 우물, 증기기관차에 물 공급
이명래 고약 본포 종근당 빌딩 들어서
著者 우 원 상

충정로에 아로새긴 백범(白凡)의 혈혼(血魂) 경교장(京橋莊)

항일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다 바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1876-1949)선생이 조국의 완전독립(통일광복)을 이루지 못한 채 흉탄에 쓰러진 ‘경교장’이 충정로 첫 머리에 자리잡고 있어 충정로가 위국충절의 고장임을 더욱 드높인다.

조선시대 도성이 축조되면서 경희궁 흥화문 앞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위 언덕마루에 세운 돈의문(서대문)이 있었고, 그 언덕 아래(서쪽)로는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초천(蔓草川)이 흘렀다. 인왕산은 그 남쪽으로 두 개의 물줄기를 내보내는데, 그 하나가 청계천(淸溪川)이고, 다른 하나는 만초천(蔓草川)이다.

만초천은 인왕산 서남쪽 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려 서대문 앞을 지나 지금의 서부역 앞을 거쳐 청파로를 따라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로 4가 현대자동차서비스회사 뒤쪽의 하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 내에는 덩굴풀이 많았던지 「덩굴풀내」의 뜻을 지닌 「만초천(蔓草川)」이었다.

「무악천(毋岳川)」이라고도 했는데, 인왕산 옆의 「무악(毋岳)」에서 발원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일제 때는 이 내를 「아사히카와(욱천.旭川)」이라 했는데, 아직도 일부 지도나 안내판에서는 이 「욱천」이란 말을 그대로 쓰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 땅이름 과정의 배우리 교수 「강의록」 참조함)

그 만초천 위에 놓인 다리를 「경곳다리」 또는 「겨굣다리」라 하였는데, 그것은 경기감영 창고 앞에 있는 다리를 경고교(京庫橋), 경구교(京口橋), 경교(京橋)라 호칭한 데서 구전된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면 옛 경기감영으로 현재는 적십자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이 충정로1가 지역으로 근래에 종로구로 편입된 곳이다. 일제에서 해방된 직 후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해외 망명지 중경(重慶)에서 환국해 계시던 곳(현 강북삼성병원 자리)을 「경교장」이라고 명명한 것은 바로 이 곳에 「경교」라는 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북삼성병원이 들어서기 전에 그 자리는 넓은 대지 위에 옛 2층 양옥이 아담하게 서 있었다. 지금 병원의 현관건물 2층이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 거처하시던 곳으로 아직도 보전되어 있다. 원래 그 건물은 그 당시 광산왕 최창학(崔昌學)의 집이었으나 몇십년만에 망명지에서 돌아와 거처할 곳이 없었던 백범 선생에게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필생의 소명(召命)이며, 소원이시던 조국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한 채 그 집 2층에서 어리석은 동포의 흉탄에 쓰러지시다니…

한많은 6.25사변 발발 전해(1949)의 6월26일! 겨레의 북극성이시여! 통곡의 돈의문 언덕이여!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픔에 떨었다.

충정로 동사무소는 단기 4303년(1970) 5월 18일에 설치되어 1975년 10월 1일에 충정로 1가를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어 편입시킨 후 충정로 2가와 3가만을 관할하면서 아울러 미근동(渼芹洞)과 합동(蛤洞)의 행정사무까지 담당하는 합동(合洞)사무소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즉 4개동을 한 동사무소가 관할하고 있는 것이다.

충정로 2가는 조선조 때 반송방(般松坊)에 속하여 권정승계(權政丞契) 조판부사계(曺判府事契), 노첨정계(盧僉正契) 등의 관명칭이 들어 있음을 보나, 돈의문의 정면 앞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관대작이 많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인창중고교(충정로2가 70) 자리에는 팔각정(八角亭)이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었다. 그 주변 마을을 팔각정골이라 하였음은 단기 4053년(1720)에 제작된 도성도(都城圖)에도 기록돼 있는 유서깊은 곳이었다.

현시에는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충정로 2가 71)를 비롯하여 인창중고등학교 경기초등학교 등 외에 여러 연수학원이 산재해 있는 학원가(學園街)로 붐빈다. 국제대학도 정릉으로 옮기기 전 이 곳(2가 2)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우체국, 은행, 해동화재보험 등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번화가이다. 서대문 네거리에는 지하철 5호선의 서대문역이 생겨 한결 교통이 편해지고 이 지역 품위를 높였다.

이 서대문네거리 일원을 일제말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일반 민초들은 「개명앞」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옛날 이곳에 있었던 경기감영(京畿監營∼적십자병원자리)에서 연유하여 「감영앞」이라 하던 것이 전음된 것이다.

충정로 3가는 충정로 2가와 북아현동 사이에 있어 2가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조 때에는 한성부 서부에 속한 반송방(盤松坊)의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芹洞) 일부, 차자리계(車子里契) 형제정동(兄弟井洞) 아현(阿峴)의 일부 지역으로서 애오개와 상공업 형성권을 같이하여 왔다. 1975년 10월 1일 충정로 3가 일부가 중구 중림동에 편입되었다.

충정로 3가는 광복 후 충정로 제1·2동회 관내에 속했다가 1955년 5월 18일 충정로3가(자체) 동사무소에서 담당했다. 그 후 1970년 5월 18일 충정로동사무소 관할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충정로 3가는 동아일보 사옥이 들어왔고 삼창빌딩이 서고 서소문로와 만나는 애오개 마루턱에 전통을 자랑하는 이명래 고약(李明來 膏藥) 본포(本鋪)가 위치했던 곳에 종근당(鐘根堂) 빌딩이 우뚝 선 것도 오랜 세월이 되었다. 「이명래 고약」은 그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 앉았다.

충정로 3가 남쪽 서소문로에는 지하철 2호선의 충정로역이 있고, 충정로와 서소문로가 애오개 마루턱에서 합류하여 신촌과 마포로 갈려나가고, 지하에서는 지하철 2호선과 5호선이 교차하면서 지상대로(地上大路)와 입체평행선(立體平行線)을 이루며 뻗어나가 사통팔달로 집산되는 요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