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15)/충정로는 돈의문(敦義門)과 더불어 독립정신의 요람
sdmnews
2006-10-18 10:37
충정공 민영환 열사 시호 딴 충정로 1가는 종로 중구 편입, 2·3가만 남아
우 원 상
충정공 민영환

충정로동(忠正路洞)은 일제시(1914)에 죽첨정(竹添町, 다케소에 죠)이라 명명했던 것을 광복후(1946)에 「충정로」로 개칭한 동명이다. 일제는 조선조 말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당시 한성주재 일본공사였던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의 조선침략외교 종적을 남기기 위해 일본공사관이 한동안 자리잡았던 이 지역을 「죽첨정(竹添町)」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일제 패망 다음해(1946년) 10월 1일 서울의 일제식 동·지명(洞·地名)을 정리함에 따라 일제침략에 맞서 순국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6) 열사의 시호(諡號) 「충정」을 따서 「충정로」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일제식 명칭에 상대성을 가지고 개정된 동·지명이 많다. 한 예로 충무로(忠武路)만 하더라도 일본인이 가장 많이 집결된 거리이며 주거지였던 본정통(本町通∼혼마찌 도오리)이란 명칭도 임진왜란 때 남해 해상으로 침입 상륙하는 왜군 선단(船團)을 속속 대파하여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전세를 호전(好轉)시킨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시호를 본따서 「충무」로 대체했다. 요즘에도 충무로를 걸을 때마다 통쾌함을 느낀다.

그 밖에도 세종로, 을지로, 퇴계로, 원효로 등 역사 속의 위인과 순국열사의 이름을 빌린 동·지명이 수두룩하다. 대개 일본식의 통(通)은 로(路)로 바뀌고, 정(町)은 동(洞)으로, 정목(丁目)은 가(街)로 정했다. 따라서 죽첨정 1,2,3정목도 충정로 1,2,3가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마포, 서강, 용산 아우른 물동교역의 매개지
충정로1가 종로·중구에 편입 2,3가만 서대문에 남아

충정로는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밖 정면에 위치하여 충정로 거리를 기간으로 길게 뻗어나가 애오개(阿峴)와 접해 있으며 조선조 초기부터 한강 수상교통의 요충인 마포, 서강(광흥창 소재), 용산을 아울러 지척에 놓고 서해 연안을 망라하여 물동교역의 매개지역이 되었으며, 또한 의주로와 교차하면서 서북부지방과 소통하고 영·호남과 연계·교류하는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요지(要地)로 발전되었다.

충정로의 행정연혁은 일제(日帝)가 1914년 4월 1일에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죽첨정으로 명명하고 1940년 7월 1일에는 경성부 서부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케 하고, `1943년 4월 1일에 서대문 사무소가 설치되면서 이곳 소속이 되었다. 동년 6월 10일 서대문 구역소(區役所)소속으로 바뀌고, 1945년 10월 16일 서대문구 관할로 다시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1946년 10월 1일에 충정로동으로 개명된 후 충정로 1가는 종로구와 중구에 편입(1975년 10월 1일)되고, 현재는 충정로 2,3가만 서대문구에 남아있다.

중구로 편입된 충정로1가
대중문화 요람 동양극장 유명

충정로1가의 적십자병원 자리는 조선조 초기(1939)에 경기 감영(京畿 監營 - 현 도청에 해당)이 있었고, 일제시에는 벽제에 있던 고양군청이 옮겨와서 14년간(1914∼1927) 자리잡은 바 있었으며, 중구에 속한 충정로 1가 지역에는 단기 4263년(1930)부터 대중문화의 요람이었던 「동양극장」이 서서 유명하였으나 근래에 헐리었으며, 그 자리에 문화일보사 건물이 들어섰다. 경기감영 옆에는 여행자를 위해 역마(驛馬)를 빌려주는 우관(郵館)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으며, 고마청동(雇馬廳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경기감영은 건양원년(1896)에 수원으로 옮겨가면서 그 자리는 군영(軍營)이 되기도 하고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쓰기도 하였다.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고장 충정로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1861-1906) 열사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며 호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서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고종 15년(187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1896년 특명접권공사로 러시아, 영국, 미국, 일본을 두루 순방하며 군부 대신을 역임했다. 1897년(광무1년)에 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을 특명으로 외유하고, 잦은 해외 나들이로 서구 문물에 일찍 눈을 뜸으로써 개화사상이 열려 정치개혁과 민권신장에 힘쓰며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했다.

일본의 내정간섭을 공박하다가 요직에서 밀려났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주권을 만회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음을 직감하고 유서를 남긴 채 45세의 나이로 순국자결했다. 오늘날 공의시호 「충정」을 「충정로(忠正路)」로 발현해 그의 숭고한 충절의 덕을 기리고 있다.

충정공 민영환의 유서

 아!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다달았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찌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서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泳煥은 한 죽엄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謝하려 한다.

泳煥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저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독립을 회복할 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다. 아! 조금이라도 실망하지 말라. 대한민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告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