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13)/서대문의 독립문화는 조국통일의 진원이다
著者 우 원 상
2006-09-14 12:13
자연과 인세(人世) 조화된 산림도시
통일마라톤의 시발점이 되자
우 원 상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한 이래 서북 대륙으로 통하는 첫 관문이 서대문(돈의문)이었다. 조선조 500여년 동안의 유일한 국제적 외교통로(外交通路)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대의 정상외교는 중국대륙 일변도였기 때문이다. 서대문은 한양 도성(都城) 4대문 가운데 하나로서 본명은 돈의문(敦義門)이다.

오늘날 「서대문구」라는 독립문화의 텃밭을 형성케 한 근원처로 새문안길 강북삼성병원 앞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인정(人定~二更으로 밤 10시경)에 닫고 파루(罷漏~五更으로 새벽 4시경)에 열어 행인을 통행케 했는데, 단기 4248년(1915)에 일제가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확장 구실로 철거함으로써 우리의 귀중한 국보급 문화재 중 하나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양 도성은 북쪽의 백악(白岳:북악~242m)을 기점으로 동쪽에 낙산(駱山~111m), 남쪽에 목멱산(木覓山:남산~263m), 서쪽에 인왕산(仁王山~338m) 등 4개의 산을 연결해 성벽을 쌓았는데, 그 성곽의 길이가 약 18㎞에 미치고 그 둘레가 원형에 근사하다. 그 4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 하고 외곽의 4개산, 즉 북쪽의 북한산(北漢山~837m), 동쪽의 용마산(龍馬山~348m), 남쪽의 관악산(冠岳山~682m), 서쪽의 덕양산(德陽山~125m) 등을 외사산(外四山)으로 하여 도읍(都邑)을 앉히고 도성(都城), 궁전(宮殿), 종묘(宗廟), 관아(官衙) 등 4대 요건을 갖추었다.

동남서로 곡선을 그으며 흐르는 한강수로 앞띠를 두르고 곡창과 수운(水運)을 천혜(天惠)의 이원(利源)으로 삼았다. 그리고 도성에는 4대문을 내고 그 사이마다 동서남북 4개의 작은문(四小門)을 끼웠다. 이렇게 수려하고 웅장한 한양도성 가운데서도 서대문(돈의문)은 대륙과의 외교 및 문화교류의 진입로였을 뿐 아니라 조선조의 숱한 역사적 영욕(榮辱)과 애환이 점철(點綴)돼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파란 속에서도 성문 밖에 이름도 찬란한 서대문독립문화의 텃밭(지역)을 일궈 민족의 자존과 긍지를 심어 왔다. 서대문구는 서울의 명산 북한산의 지맥(支脈)인 안산(鞍山:무악 296m)과 인왕산, 백련산(白蓮山, 224m) 등 3개의 산과 홍제천줄기를 주맥으로 하는 쾌적한 산간 전원도시(山間田園都市)였다.

오늘에 와서는 전원(田園)이 없어졌으니 산간임원(山間林園) 도시로 호칭함이 좋을 성싶다. 약칭 「산림도시」라 하던가! 서대문 지역의 역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삼국시대 백제땅이었으나 단기2808년(475)에 고구려(장수왕)의 판도가 됐다가 서기 553년에는 신라로 넘어갔다. 고려 때에는 양주목(牧)에 속했다가 한양군(郡)으로 개칭되고 고려 문종 21년(1087)에는 삼소경(三小京)제도로 양주를 남경(南京) 관할구역에 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서대문이 한성부 서부지역의 반송방, 반석방과 북부의 삼평방, 연희방, 영은방의 일부지역으로 변천됐었다. 현재는 생활권이 다양화돼서 지역별로 특색을 간직하며 발전하고 있다. 요즘에는 아파트 전성시기라 아파트 단지가 늘어가고 있어 신흥 도시의 인상을 풍긴다.

무엇보다도 연세대학, 이화여대를 비롯한 7, 8개의 상아탑(象牙塔)이 우뚝 서 있으며, 40여곳에 초·중·고등학교가 밀집돼 있는 교육의 중심도시로 변모했다. 또 2002년 월드컵 경기장에 인접해서 그 파고(波高)에 따르는 새로운 면모를 거듭해 가고 있다. 서대문의 미래상(未來像)은 역사적 독립문화의 상징적 터전에서 남북통일의 기점(起點)으로 삼아 자연과 인세(人世)가 어우러진 살기좋은 산림도시(山林都市)로 가꾸어져 균형있게 발전되기를 희구(希求)해 마지 않는다.

광복절 봉화제전(烽火祭典)과 성화전수(聖火傳授) 광복맞아 남산·북악·안산서 3일간 독립봉화제전 마리산은 역사선상의 큰 사적, 독립문화 극치 10월이 오면 청량한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결실의 숨결이 알알이 여물어감을 느낀다.

그보다도, 아득한 옛날 으뜸(첫) 갑자(上元甲子)년 상달상날(上月上日∼10월3일)에 한울이 열리고 한 어른께서 백두천산에 내리시어, 우매한 백성들을 교화(敎化)로써 화육(化育)하시던 중 두돌갑자 지난 무진년(再周甲子, 戊辰)에 삼천단부(三千團部)의 추대로 임금이 되시니, 비로소 배달(밝달)나라의 법통이 만대(萬代)에 드리워지고 「홍익인간」의 제세(濟世)이념을 밝힌 개천(절)의 달이라는 데에 시원적(始源的)인 깊은 뜻이 있다.

거기에다 만민을 위해 한자권(漢字圈)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독창적인 한글문화를 창출한 한글날(10월9일)이 곁들여져서 개천의 의의를 더욱 드높인다. 새삼스레 한가지 더 첨언한다면 우리 민족 성화(聖火) 전수(傳授)의 날이 또한 개천절에 겹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해방 다음해(1946년)에 광복 제1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그 행사의 일환으로 3일간의 독립봉화제전을 벌였다.

서울의 세 명산인 남산, 북악, 안산(鞍山)에서 해방독립의 횃불이 하늘 높이 올랐다. 그 봉화의 불씨는 장장 32년만에 망명지(亡命地:중국)에서 갓 돌아온 우리 민족 정통종단인 대종교 총본사(大倧敎 總本司)에서 채화(採火)됐다. 8.15 전야(前夜) 오후 6시에 대종교 천진전(天眞殿)에서 단애 윤세복 종사(檀崖 尹世復 宗師교주)에 의해 지펴 준 불씨를 봉화전송단 대표인 마라톤 왕 손기정(孫基禎)씨에게 전수하여 남산 정상에 마련된 봉화대에 전송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받아 직접 점화(點火)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장면이었다. 이 역사적인 독립봉화제전을 민족의 성화(聖火)로 승화시키기 위해 보본(報本)의 제천단인 강화 마리산 참성단(塹城壇)에 전수시키기로 하고 같은 해(병술년) 10월3일 개천절에 거족적인 축전(祝典)으로서 관·민·각계 인사가 모여 당일 정오(正午)에 참성단에서 성화제(聖火祭)를 봉행하였다.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그 날 아침 6시에 천진전에서 성화전수식(聖火傳授式)을 거행하고 마라톤 선수 함기용(咸基鎔)이 주자(走者)로 나서 마리산까지 전송했다.

그 당시 민정장관(民政長官)이었던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선생이 이를 받아 점화함으로써 성화 제천의를 엄숙하게 받들었다. 이로써 국조 단군대황조께서 개국 51년에 제단을 축성케 하고 3년 뒤(辛酉)에 몸소 천제를 드려 근본을 갚고 은혜에 보답하는 경천(敬天), 보본(報本)의 정통윤리를 심어 주신 유서깊은 강화 마리산에 우리의 성화가 뿌리내렸다는 것은 유구한 역사선상의 큰 사적(史績)이며 독립문화의 극치(極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