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獨立協會)」는 우리나라가 개화기(조선조 말엽)에 접어들면서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민권유린이 극심해져 국운이 풍전등화 격으로 암울한 정황하에 놓였을 때 이를 각성한 개혁 세력이 결집된 구국 단체로서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 단체였다.
갑신정변(1884) 실패로 미국에 망명중이던 서재필(徐載弼 - 186 4~1951)이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 사면으로 10년 만에 환국(1895년 12월말)해 바로 독립신문을 창간(1896.4.7)했으며, 이어 같은 해 7월 2일 독립협회를 발족시켰다.
1898년 12월까지 2년 6개월간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 사상에 의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근대화 운동을 표명하고 자주독립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강령으로 내걸고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삼아 시행에 옮겼다. 짧은 기간이지만 실로 많은 사회 운동으로 괄목할 만한 역사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독립신문이 먼저 창간된 것도 독립협회 조직에 원동력이 됐다. 독립협회의 구성세력은 구미파 모임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와 갑오개혁파 모임의 건양협회(建陽協會), 그리고 자주개혁정책을 추구하는 실무관료층 및 각계의 신흥사회세력으로 주맥을 이뤘다. 여기에서 신흥사회세력이란 해외유학, 외유(外遊), 신교육, 신문, 서적 등을 통해 근대 사상과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신지식층으로 서구적 지식층과 개신유학적 지식층으로 구분된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 신지식층 독립협회 지도적 역할 독립협회의 지도적 구실을 한 신지식층에는 서구시민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재필,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등이 최고 지도층을 이뤘고, 개신유학의 전통을 이어 받은 남궁억(南宮檍), 정교(鄭喬), 유근(柳槿) 등이 중견층을 이뤘다. 이들은 독립신문, 독립협회지, 황성신문을 대변지로 활용하면서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세력을 계몽, 포용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 민중단체로 발전했다.
1897년에는 보수파 정권의 외세의존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1898년에는 구국선언을 기점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 민중의 정치활동을 개시해 국가 정책에 반영하고 국익, 국권, 국토 수호를 포괄하여 자주국권운동과 자유민권 운동을 아우르고 의회 설립을 추구, 국민 참정운동을 전개하여 만민참정권을 공인케 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4,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전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정부에 대해서는 강력한 압력단체가 됐다.
독립협회의 활동은 △애국 계몽 △국권수호 △국토수호 △이권수호 △인권보장 △개혁내각 수립운동 △국민참정 △정치 운동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가시적으로 항상 눈에 띄며 독립협회를 연상케 하는 것은 독립문과 독립공원이며, 요즘 재건된 독립관이 곁들어진다. 이 또한 서울(서대문) 독립문화의 효시이다.
꽃다운 나이 ‘스물’ 갑신정변 주역, 일가 자살, 참형, 두살 아들 아사한 비운의 청년 「개혁과 독립」의 화신이 된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정치가」라기보다는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혁명가요, 독립운동가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다. 그의 호는 송재(松齋), 본관은 대구(大丘), 미국의 귀화명은 제이슨(Jason. P).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 홍암대종사(羅喆: 1863∼1916)보다 한 해 늦은 단기 4197년 (1864)에 그와 동향인 전라남도 보성에서 서광효(徐光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경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박영효(朴泳孝) 등과 교류(交遊)하면서 개화사상에 젖어들었다. 1884년 12월에 김옥균을 주축으로 개혁파 동지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로 끝나고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괄시받자, 1885년 4월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멀리 미국으로 망명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역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스물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역적으로 몰린 그의 부모, 형, 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을 당하였으며, 두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이 단장(斷腸)의 슬픔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미국에 귀화해 모국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주저앉은 사연을 짐작할 만하다. 미국에서의 서재필은 현지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진학, 의학공부를 하고 모교(의과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미국여성과 결혼하고 워싱턴에서 병원 개업도 했다.
망명 10년에 고국에서 대역죄 사면(1894)으로 1895년 말 서울로 돌아와 곧바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이어서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공원 조성을 획책하고 국가와 사회개혁에 의한 진정한 독립국가 형성을 추구하면서 혼신을 다 바쳤으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1898년 수구파와 열강의 이권침탈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들의 야합으로 추방의 비운을 맞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후보 출마 이승만에 패해, 생애중 모국 체류기간 25년 모국에서 일군 ‘독립’ 100여년간 겨레 등불 밝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전 재산을 정리, 독립자금으로 바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본 패망 후 미 군정의 요청으로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1947)한 후, 다음해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이승만(李承晩) 후보에게 패해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1948).
미국에서의 제이슨(서재필)은 1951년에 풍운의 한 생을 마치니 향수(享壽) 87세라, 평생 모국에 머문 기간은 유·소년기(幼少年期)를 포함해 고작 25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가 모국에서 일궈 놓은 독립신문, 독립협회와 독립문·독립관을 필두로 「독립(獨立)」이란 용어는 100여년 동안에 이루 헤일 수 없이 무한정으로 통용되어 오면서 겨레의 등불을 밝혔으며, 조국을 지키는 대명사(代名詞)가 됐다.
일제에서 해방된지도 어언 반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국토는 양분된 채 남북의 통일은 아직 묘연하다. 이것은 완전독립이 아니다. 또 현실은 일제 침탈에서 열강의 문화적, 경제적, 사상적 예속(隸屬)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IMF(국제통화기금)로 인한 경제 난국 상황도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적으로 국사(國史), 국어의 비하(卑下) 현상만 하더라도 자주·자립·자강 정신에서 벗어나 사대(事大)·식민(植民)의 늪으로 스스로 빠져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유구한 역사성이 깃든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정체성이 결여된 「국제화·세계화」라는 미명(美名)은 평등적 균형을 잃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옛 속담에 비유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