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11)/해방 후의 독립신문
著者 우 원 상
2006-08-23 17:15
일본 패망 후 미군정 대항, 독립의지 펼쳐
완전독립 성취 못한 채 명색없는 종지부 찍어
著者 우 원 상

상해에서 「독립신문」사장을 역임했던 김승학(金承學, 1881-1964)이 우리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자마자 신문창간에 착수하여 단기 4278(1945)년 11월 11일에 서울 태평로 1가 38번지에서 창간호를 기점으로 고국에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처음에는 주간으로 시작하다가 일간지로 전신하면서 제호(題號)도 한자에서 「독립신문」으로 한글화했다. 사시(社是)로 국민여론의 환기정도(喚起正導), 민족문화의 채굴선양(採掘宣揚), 국민원기의 고무진기(鼓舞振起), 노농대중의 이익옹호, 두국도배(나라를 좀먹는 무리들)의 배격소청(排擊掃淸)을 제시하고 우익 정론지로서 활약했다.

광복 직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상회의(1945. 12)에서 한반도에 5개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일방적인 결정으로 온 국민을 격분시켰다. 이것이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번져서 신탁통치 찬·반론으로 갈려 좌·우익이 극한적 대립의 양상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독립신문은 신탁통치를 즉각 반대하면서 독립론을 폈다.

이 신문은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계승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중국대륙을 전전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까지 한 우리 임시정부가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 자격으로 환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임정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었다. 부득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을 망정 임시정부의 법통을 버릴 리가 있겠는가! 이내 비상국민회의(뒤에 국민회의로 개칭)를 구성, 「임정추진회」를 발족시키는 등 다각도로 임시정부를 법통정부로 내세우며 독립을 추구했다.

따라서 임정노선(臨政路線)은 미군정과 자주 각축전을 벌였다. 독립신문이 임시정부 정신적 구심체 역할 “남북한 총선거 실시해 통일정부 세우자” 민족진영 지지 이런 정세하에서도 독립신문은 임시정부를 정신적인 구심체로 삼아 그 대변지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다.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한 이승만 박사와 맞서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김구 주석(金九 主席)을 주축으로 한 임정과 민족진영의 주장을 적극 지지했다.

또 이 신문사의 사업으로 대한독립의 순국열사와 건국지사의 행적을 기획하여 구현코저 했다. 1947년 7월 15일에는 좌익테러단의 습격을 받아 문선시설이 파괴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金九) 선생의 암살을 계기로 임정계열과 독립신문은 침체상태에 빠졌으며, 1950년 6·25사변으로 그 끝말(맥락)을 다시 찾지 못했다.

임시정부와 함께 갖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소리높여 외쳐 왔건만, 조국의 완전독립과 통일이 성취되는 날을 기다려 환희에 찬 필치로 대서특필(大書特筆)하지 못한 채 명색없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 무상(無常)할 뿐이다. 여기에서 한 번 짚어봐야 할 인물이 있다. 상해에서 서울에 걸쳐 그의 성품처럼 고집스럽게 독립신문을 부여잡고 버텨온 항일투사, 그가 바로 정부에서 2001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김승학(金承學) 열사이다.

그는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광하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희산(希山)이요 본관은 배천인(白川人∼배천인으로 발음한다)이다. 사범학교를 나와 여러해 동안 교편생활을 하다가 39세 되던 해(1919)에 만주로 망명, 재만 독립단에 참여해 광복군 사령부 군사부장에 피임(被任)됐고, 41세(1921)에 상해 독립신문사장에 취임했다.

47세(1927)에 임시정부 재만 육군 참의부 참의장으로 항일전쟁에 공헌했으며, 49세(1929)에 중·일 군경합동대에 피검되어 신의주, 평양감옥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또다시 망명해 독립투쟁에 투신했다) 65세(1945)에는 광복을 맞은 서울로 귀환, 독립신문을 재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해 66세(1946)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임됐다.

69세(1949)에 항일독립종단인 대종교(大倧敎)의 정교(正敎)로 승질하고 대형(大兄)으로 존칭받았으며 82세(1962)에 건국훈장 국민장의 보훈을 받고 85세(1965)를 일기(一期)로 항일무장투쟁가로 상징되는 생애를 쳤다. 저서에 「한국독립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