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로 출현한 독립신문은 단기 4252(1919)년 4월에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창간된 등사판 인쇄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체제로 장기영(張基永)과 김학현(金學鉉) 등이 발행했다. 그 발행부수는 5,000부였다고 한다.
항일운동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낯선 땅 북해의 일각에서 어렵게 창간됐으나, 재정난으로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무산(霧散)됐다.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해인 1919년 8월 21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창간된 것이 세번째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의 초창기 제작진은 사장 및 주필에 이광수(李光洙), 편집국장에 주요한(朱耀翰), 영업국장 이영열(李榮烈)이 자금을 대고 조동호(趙東祜), 김여제(金輿濟) 등이 참여했다. 이 밖에 10여명이 필진이 활약했다. 이광수는 창간사에서 신문의 사명을 「첫째 민족사상 고취와 민심의 통일, 둘째 우리 스스로 보도기관을 운용 세상물정과 사상을 알리는 구실, 셋째 정부를 독려, 국민의 진로와 방향제시, 넷째 새로운 학술과 사상을 소개, 다섯째 새로운 국민성 조성」 이라고 밝혔다.
매호 4면으로 주 3회를 원칙으로 발행했으나 경영난으로 불규칙했다. 판형은 타블로이드판보다 약간 작았다. (세로 33.5㎝, 가로 23.4㎝). 문체는 국한문 혼용, 띄어쓰기 없이 세로짜기였다. 이 신문은 제호를 신문간행 제21호까지 「獨立」으로 사용하다가 제22호(1919.10.25)부터 「獨立新聞」이라 바꾸었고 제169호(1924.1.17)부터는 한글로 「독립신문」이라 고쳐 세번이나 변경했다.
이광수, 주요한이 제86호(1920.6.24)까지 발행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그 후임에는 사장에 김승학(金承學), 주필에 박은식(朴殷植), 편집에 차리석(車利錫)이 맡았다. 박은식은 신문논설을 통해 「적과 전승(戰勝)할 능력을 기르라」, 「적이 흥화문(興化門)을 훼각(毁却)한다」, 「왜노(倭奴)의 강횡(强橫)이 익심(益甚)」 등 여러 편의 통렬한 항일통론(抗日痛論)을 폈다.
1922년 7월에는 김승학, 백광운(白狂雲), 장기초(張基礎)의 출자로 한문판인 중문보(中文報)를 겸행하여 중국의 각 성정부(省政府)와 관공서, 학교, 공공단체 등에 무료로 배포했다.
독립신문의 보급망은 집안(輯安), 통화(通化), 연길(延吉), 호놀룰루 등 15개의 지국과 흥경(興京), 임강(臨江) 등 21개 분전소(分傳所)가 있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망이었던 연통제(聯統制)하의 만주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연락원이 지하 보급을 했다.
신문 발행 외에도 「독립신문총서」, 「한국독립운동의 진상(나다니엘 페퍼의 저서∼김여제 번역)」, 이광수의 「독립신문 논설집」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 「이순신전」 등 많은 책자를 출판했다. 1924년부터 극심한 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에 허덕이다가 단기 4258(1925)년 9월 25일 제189호를 종간호로 통분을 안고 폐간됐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민족자립정신을 고취하면서 항일독립투쟁언론의 험난한 길을 끝끝내 지켰다.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