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하면 독립문과 더불어 서재필(徐載弼)이란 고명(高名)을 떠올리게 한다. 단기 4217년(1896) 4월 7일 서재필이 주동이 되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국운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독립신문」이라 이름붙인 신문이 3종류나 더 출현했다.
블라디보스톡(海蔘威)에서 출간된 독립신문이 있었고, 그 다음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독립신문이 대하를 이루었으며 또 해방 후 국내에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의 계승적 구실을 한 독립신문이 있다. 갑신정변(甲申政變∼1884년 고종 21년)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0여년만에 귀국하자마자 개혁파의 지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이것이 우리 언론의 효시일뿐 아니라 개화(開化)의 첨예(尖銳)한 선봉장이 됐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요 실패 원인을 민중의 지지가 결여된 때문으로 보고 개혁의지를 국민에 알려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대중매체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독립신문은 준비 과정에서 유길준(兪吉濬)의 협조로 갑오경장(甲午更張∼1894)을 추진하던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지원을 받아 순조롭게 출발했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정변이 일어나 좌절위기에 놓였다. 다행히도 제2 개혁세력의 지지를 얻어 박정양(朴定陽) 내각의 후원하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독립신문의 크기는 가로 22㎝, 세로 33㎝의 타블로이드판으로 모두 4면이 있으며, 제3면까지는 국문판으로 편집하고 제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 주3회(화,목,토)의 격일간지로 발행됐다.(1898.7.1부터 일간으로 발행)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로서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사설을 담당했고, 주시경(周時經)은 조필(助筆)로서 국문판 제작과 편집을 담당했고, 독립협회 창립(1898.5.11) 이후에는 협회의 대변지로서 자주 민권 자강운동을 지원하고 민중을 계몽, 지도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정치, 국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날카로운 필력으로 정론을 폈다. 탄압에는 저항을 서슴지 않았다.
1897년말 서재필의 추방이 결정되고 신문은 정간의 위기를 맞았다. 1898년 5월 12일에 복간되어 같은 해 12월말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윤치호(尹致昊)가 주필이 되어 발행됐다. 독립협회 해산 뒤에는 「아펜젤러」가 이었다가 「엠벨리」가 맡아 신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애를 썼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1899년 12월 4일자로 종간호를 내고 폐간됐다. 1896년에 창간되어 1899년에 폐간되기까지 제4권 278호를 내고 약 4년간의 파란만장한 지령(紙齡)을 일기(一期)로 종지부를 찍었다.
4년간 근세사 빛나는 업적 남겨 주권, 민주사상 제창 독립신문의 필봉이 위력을 떨치던 4년이 짧은 기간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공헌한 바는 근세사에 빛나는 업적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
① 근대사회의 진보적 지식과 사상을 공급, 국민의식 변혁에 공헌했다.
② 한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 간섭 정책을 폭로 비판, 독립과 국가 이익 수호에 전력했다.
③ 주권과 민주사상을 펴는데 주력, 참정과 의회 설립 제창했다.
④ 서재필의 민주주의적 결산과 주시경(周時經)의 민족주의 사상이 결합, 민족언어와 국민 발전에 공헌했다.
⑤ 부정부패와 탐관오리 횡포를 고발, 지탄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⑥ 독립협회 창립에 사상적 소양을 제공, 창립후에는 기관지로 자주 민권 자강운동 기반 구축에 공헌했다.
⑦ 만민공동화 운동(1898)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⑧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여론·공론을 형성한 정치활동 전개방법을 깨우치고 언론 출판 문화의 진흥에 이바지했다.
⑨ 국제 정세 속에서 위치를 인식시키고 세계 여러 나라의 문물을 소개, 한국인의 시야를 넓혔다.
⑩ 영문판을 발간, 한국인의 처지에서 한국의 사정과 의사를 공정하게 세계에 알려 독립과 권익을 주장, 옹호하는 구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