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칼럼/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8)/파란만장 풍운의 역사 간직하다
著者 우 원 상
2006-07-19 16:48
열강 예속으로부터의 자주독립 결의 표명
헐린 홍살문 자리 돌기둥만 남아 사적 33호 지정
著者 우 원 상

독립문(獨立門)은 사적 32호로 지정된 역사기념물로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세워져 있는 한말의 석조문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 1884)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徐在弼)이 갑오경장(甲午更張 - 1894) 이후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가 사면(1895.3.1)되자 1896년에 귀국해 자주독립과 자주민권, 자강(自强)운동을 지향하는 독립협회를 조직, 그 첫 사업으로 독립문 건립을 발의했다.

국왕의 동의를 얻고 많은 동지와 국민의 폭넓은 호응을 받으면서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고 1년 뒤인 1897년 말에 완공했다. 그것은 열강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의 결의를 표명하려고 사대외교의 상징물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운 것이다.

이 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의해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했으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규모가 작고 미적 배려가 부족해 서양식 석조물이면서도 재래식 성벽 축성 수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대범하고도 획기적인 석조 건축물이었다. 그 크기는 높이가 14.28m, 폭이 11.48m이며, 45㎝×30㎝ 규모의 화강암 1850개로 축조되었고 중앙에 홍예문(虹霓門 ∼ 무지개형 문)이 있어 내부 왼편에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놓여 있으며 정상에는 돌 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 이맛돌에는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현판석이 있는데 문 앞쪽(남쪽)은 한글로 「독립문」이라 새겼고 문 뒷쪽(북쪽)은 한자로 「獨立門」이라 새겼으며 양편 현판석 모두 좌우에 태극기가 음각돼 있다. 이 독립문 앞에는 돌기둥 두 개가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이 돌기둥은 조선조 태종(1400~1418) 때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루(慕華樓)를 세종(1418~1450) 때에 모화관이라 개칭하고 그 건물 입구에 세운 홍살문을 중종(1506~ 1544) 때 영조문, 영은문으로 불러오다가 독립문 건립을 위해 헐리고 주초(柱礎) 돌기둥만 남아 사적 33호로 지정해 오늘에 보존되고 있다.

단기 4312년(1979) 성산대로 공사로 인하여 독립문 이전이 불가피하게 됨으로써 그 자리에 「독립문지(獨立門址), 이전일자 1979. 7.13, 서울특별시장」 이라고 새겨진 기념동판(가로 70㎝, 세로 70㎝)을 묻고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 이 공사는 1980년 1월에 완공됐다. 그 당시, 서울시가 성산고가도로 건설을 계획(설계)하면서 문화재를 중요시하는 역사 의식이 넉넉했더라면 독립문은 옮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독립문 위로 고가다리가 지나가게 설계가 됐다고 각계의 항의와 여론이 끓어오르자 궁여지책으로 고가도로를 곧게 뽑지 못하고 독립문을 피해 가느라 우측으로 구부려 무지개처럼 휘어져 공사됐다. 말 그대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의 고가도로가 됐다. 그래도 신통치 않아 결국에 가서는 독립문을 옮길 수밖에 없는 비운을 맞았다. 파란만장했던 한말의 풍운을 안고 일제 침탈의 암흑시대를 표류하던 우리 겨레에게 자존과 희망의 등불이요 등대지기가 됐던 독립문은 현시에도 국난극복의 상징이자 남북통일의 시발점이며 원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