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칼럼/홍제천의 봄
독립문화(獨立文化)서대문의 긍지
著者 우 원 상
2006-06-26 15:27
독립공원, 쓰라린 과거 증거하는 교육현장
다물사상 근원한 자주독립의지 승화시켜야
우원상 편집고문

오늘의 핍박(逼迫)한 현실은 모진 태풍(IMF)에 휘말려 표류하는 모선(母船)의 침몰을 막으려고 한 배를 탄 모두가 숨막히는 사투(死鬪)를 계속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근세사에서 최근의 100년 동안만 하더라도 무려 세 차례의 커다란 국난을 겪으면서 평안한 세월이란 별로 없었다. 그 첫번이 잔학한 일제의 침탈이었고, 그 다음이 처절한 6·25사변이었으며 세번째가 오늘의 참담한 경제위기라 하겠다.

이 위기회복 또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를 것인가? 그렇지만, 우리의 고장(서대문의 터전)에는 수난의 역사로 하여금 국난극복의 정신적 바탕이 된 독립문화(獨立文化)가 뿌리깊게 깔려 있다. 이 바탕이 있기에 어떠한 난관일지라도 능히 뚫고 나갈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근세(近世) 개화기(開化期)의 사적(史蹟) 독립문(단기 4230년-서기 1897년에 건립)이 옛 한샘터(靈泉)에 터주로 뿌리내린 이래 사대(事大)사상을 벗어난 자주독립의 금자탑(金字塔)으로 일백 여년간이나 우리를 지켜 왔다.

그 근처에는 독립문과는 대조적으로 일제강점하(日帝强占下)에서 숱한 항일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처형당했던 서대문형무소 자리가 넓게 차지하고 있다. 요즈음 이곳을 「독립공원」이라 명명(命名)하여 나라를 잃었던 쓰라린 과거(역사)를 증거하는 교육의 현장(現場)으로 남겨져 있다. 마침 이 공원을 「순국선열 유족회」가 근간에 복원된 「독립관(獨立館)」을 관리하면서 선조들의 넋을 달래며 그 유지(遺志)를 받들고 있음도 필연적인 인과(因果)가 아닐 수 없다. 이 유족회에 「독립군가선양회합창단」이 부설된 것도 이채롭다.

또한, 일제침탈기에 삼십수년간을 고스란히 해외 망명지(亡命地)에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청산리·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여러 독립전쟁을 주도하면서 오로지 항일독립투쟁으로 일관한 대종교(大倧敎)가 어찌 또 서대문 지역에 들어와서 홍은산(弘恩山) 자락에 성역(聖域)의 울타리를 틀고 우리 민족얼을 지키며, 배달의 정통문화와 고유신앙을 선양하고 있음인가! 이 또한 우리고장에 자주독립정신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증좌(證左)가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나라 잃은 민초(民草)들의 실낱같은 삶의 불씨를 꺼지지 않도록 돋구어주던 무형(無形)의 음향(音嚮)이 있었으니 바로 안산(鞍山)남녘 골짜기에 자리한 새절(奉元寺)의 인경(큰종) 소리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마다 4시반쯤이면 은은히 울려퍼지면서 원근의 방방곡곡에 지쳐 고단히 잠들었던 민초들의 새벽잠을 깨우고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하던 그 종소리는 그 날의 시작이요, 삶의 확인이었다. 그 당시는 한갓져서 30리 밖에서도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안산의 봉수대(봉화둑) 역시 독립문화에 한몫을 차지하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수난의 역사로 인하여 영욕(榮辱)이 교차하던 유서깊은 무악재 또는 홍제천과 같이 우리의 긍지와 한(限)이 서린 유무형의 역사적 향토성이 깃든 유산이 아우러져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한 것이 서대문의 「독립문화」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서대문의 긍지요 영예(榮譽)이다. 그러나 이 독립문화는 근세에 급작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국조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으로 개국한 고조선조 이후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을 받으면서 계속 축소되어간 강역(彊域)이나마 정통문화를 지키며 배달겨레의 명맥을 면면히 이어 온 것이다.

아울러 민족자존(自存)의 몸부림 속에서 발생한 다물(옛 영광에의 회복∼恢復)사상이 뿌리내려 역대(歷代)로 그 맥을 같이하여 왔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꾸준히 노력하였고,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 판도(版圖)의 회복을 계속 추구하였을 뿐아니라 고려 중엽에는 몽고(元)의 침입으로 40년 동안이나 항몽항쟁(抗蒙抗爭)을 지속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도 북벌(北伐)의 대망(大望)을 잃지 않았다. 다만 외세의 침입을 막기에 급급하여 뜻을 펴보지 못하였다.

처참한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 전 국토가 유린되었었고, 또 다시 병자호란(1636년)으로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했으며,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서도 세계열강(列强)들이 한국에서 서로 다투어 이권 침탈에 혈안이 된 정황(情況)으로 국운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를 좌시할 수 없는 민족 자각(自覺) 운동이 일어나 실학(實學)을 바탕으로 한 개화사상이 싹텄으며, 거듭 자주독립사상으로 발전하면서 사대주의의 표출(表出)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오늘의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이 자주독립사상은 일제가 열강국들을 제치고, 한국을 강점하자 거족적인 항일독립 투쟁으로 맞서 무수한 희생을 치렀다. 이렇게 준엄하고도 끈질긴 저항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물사상」에 근원한 자주독립사상이었으며, 유구한 역사속에 수많은 수난이 누적되어 내려오면서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한 자주(自主), 자립(自立), 자강 (自强), 자위(自衛)정신의 발로(發露)로서 인류평화를 지향한 홍익인간 이념과 단일민족의 정통문화가 융합하여 조화(調和)를 이룬 것이 독립문화의 본질이다.

이것이 소위 국제화·세계화시대에 먼저 다져야할 기조요건(基調要件)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독립문화를 올바로 인식하고 창달해서 국난 극복과 조국통일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