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4)/서대문의 역사 및 연혁(沿革)
著者 우 원 상
2006-06-20 14:45
삼국시대 ‘백제’영역이었던 서대문
서대문구청 합동서 1977년 연희동으로 옮겨

한양은 우리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으로 뻗어내려와 그 정기를 타고 솟은 북한산(삼각산, 837m)을 배경으로 백악(북악산 342m)을 도성의 수봉으로 하고 동쪽으로 뻗은 낙산(駱山, 111m)을 좌청룡으로, 서쪽으로 뻗은 인왕산(338m)을 우백호로 하고 남쪽으로 목멱산(木覓山, 232m 남산)을 맞은 편뫼(案山)로 치고 한강(漢江)이 남서로 흐르며 그 남쪽에 우뚝 솟은 관악산(冠岳山, 629m)이 강북의 북한산을 조회하는 듯하여 고려 때부터 왕도가 될 만한 명승 명당지로 지목되어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한양을 한성(漢城)이라 하는 바 성안과 성밖 10리까지를 포괄한 것이다. 한양 서부지역의 돈의문(敦義門∼새문)밖 10리를 한 행정구역으로 묶은 것이 서대문구로서 현 면적 17.69㎞, 인구 약 40만명, 구청 소재지는 연희동이다.

서울의 역사와 정서 같이 해온 서대문
1944년 마포구역소 분리, 1979년 은평구 신설 분가시켜


서대문의 역사는 서울(한양)의 변천에 따라 그 정서를 같이 해 왔다. 서대문 지역도 서울 일원(一圓)과 함께 석기시대부터 취락을 이루며 살며 농경과 수렵·어업을 생활수단으로 삼았다고 본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BC 18년경 백제 영역이었으나 AD 475년에 고구려(장수왕 때) 판도에 들어갔다가 AD 563년에 다시 신라에게 넘어갔던 지역에 속한다.

고려시대에는 지방행정 중심지인 12목(牧)의 하나로 양주(楊州)에 속했다가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되었다. 문종 21년(AD 1087)에는 3소경(三小京) 제도로 양주를 남경(南京)의 관할 구역으로 정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분류(행정구역)했는데, 서대문지역 서부에는 반석방(盤石坊)과 반송방(盤松坊), 북부에는 상평방(常平坊), 연은방(延恩坊), 연희방(延禧坊)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경성부 구역을 축소해 이 지역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연희면, 은평면으로 내보냈다가 1936년에 경성부 구역 확장으로 다시 경성에 편입되어 서부출장소 관할에 두었다. 1943년에는 서대문사무소를 두었다가 다시 서대문구역소(區役所)로 바꿨다. 이 구역소를 광복후에 구청으로 호칭을 변경했으나 그 구청 소재지(위치)는 처음부터 합동(蛤洞) 프랑스 대사관 정문 진입로 오른쪽에 있었다가 1977년 5월 16일에 연희동 현 위치로 옮겼다.

1944년(광복 전해)에는 마포 구역소가 분리 신설되어 서대문 관할의 약 1/3이 축소됐다. 1979년에는 서대문 서부지역에서 은평구(恩平區)가 신설되어 분리돼 나갔다. 결국 서대문 지역구에서 마포구와 은평구를 분가시킨 셈이다.

조선조 이후 서대문지역의 발자취와 긍지(矜持)

조선조 태조 때의 중신 하륜(河崙)이 새 왕조의 도읍지로 안산(鞍山∼毋岳) 이남 지역을 풍수지리상의 명당지로 천거해 무악(안산)을 배경으로 하고 남으로 한강을 앞 방패로 삼아 한반도의 중앙에 좌정하는 것이 팔도(八道) 지배가 용이하다고 주장하며 한양정도(漢陽定都)의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 또는 毋岳定都論이라 함)을 폈다. 그리고 강남에 광활한 평야가 놓여있어 천혜(天惠)의 명당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도읍지로서는 협소하고 성벽을 두르는데 지형의 균형이 안 맞는다는 반론(反論)을 받아들여 뒤로 한 발 물러선 것이 오늘날 서울의 성곽이다.`북쪽 변방에서 한양에 도달하려면 의주(義州)에서 평양, 평산, 개성, 임진강, 파주, 벽제, 무악재를 넘어 한양도성에 입성하게 된다. 한양의 상징적 명상인 북한산(삼각산)줄기의 여러 봉우리가 연이어졌고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가 서 있는 비봉(碑峰)이 한눈에 아로새겨진다.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의 큰 비중은 서북대륙의 나라들(明, 元, 淸…)로 통하는 성문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이 각국 사신들의 유숙으로 호화로웠다. 서대문 밖은 서북대륙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였기에 임진왜란(1592∼1598)도 겪었고 병자호란(1636∼1637)도 당했다.

서북대륙으로 통하는 서대문 밖 호화로운 모화관
영은문 철폐후 자주국 선포하며 독립문 세워


인조반정(1623)도 바로 홍제원이 근거지요, 출발점이었고, 이괄(李括)의 난(1624)도 안산과 무악재에서의 전투로 판가름 났다. 일본 공사(公使)가 상주하던 청수관(淸水館)도 서대문 밖 금화산 밑이었다. 임오군란(1882)으로 일본 공사관(청수관)이 소실되고 일본공사 일행이 도망가는 등 혼줄을 내기도 했다. 청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 세계 만방에 완전독립 자주국임을 선포한 것으로 해서 영은문(迎恩門)을 철폐하고 독립문이 건립된 것도 서대문의 긍지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철도가 준공(1900)되어 그 시발역이 서대문역이었다. 지금의 서울역은 「남대문역」이라 했고 서대문역이 서울의 본역이었다. 경인철도 개통식이 서대문역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그 서대문역의 위치는 일제시 전매청 서울담배 제조창이었던 현재 경찰청 근방이었다고 본다. 일제 침탈기에 무악재 아래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수천 수만명의 독립투사들이 혹독한 고초와 시련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6.25 사변 당시에도 남·북 양측군이 진·퇴를 교차하던 곳 또한 무악재였다. 무악(안산)정상에는 역사적인 봉수대(烽燧臺 봉화둑)가 서울의 파수꾼으로서 국방통신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서북방의 의주로 통하는 무악재길을 의주로(義州路)로 불렀으나 근래에 통일로(統一路)로 개명했다. 서대문지역은 개화기(開化期) 근대화의 요람지였고 독립문화의 터전이며 앞으로 조국통일의 시발점이며 나아가 미래지향적 향토(鄕土)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