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사람들
홍제천의 봄
홍제천의 봄(3)/서대문구의 근원은 돈의문(敦義門)
著者 우 원 상
2006-06-20 13:44
서북대륙과 통하는 의주로의 관문 ‘돈의문’
일제강점기 철거, ‘새문’으로 불려
著者 우 원 상

서대문은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한 문으로 서쪽이 정문으로 도성축조(都城築造)와 더불어 1396년에 세워졌으며 본명은 돈의문이다. 서북대륙과 통하는 의주로(義州路)의 관문이다. 이 돈의문과 같이 생긴 이래 여러 번의 변천을 겪은 문도 다시 없으리라. 원래 그 위치는 인왕산 줄기로 지금의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사직동(社稷洞) 고개에 섰었다.

그러나 태종(太宗) 13년(1413)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楊善)이 정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이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 양다리 같으니 인마(人馬)의 통행으로 지맥(地脈)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두 문을 폐쇄하고 그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했다. 따라서 돈의문도 같은 이유로 함께 폐쇄되어 의주로와의 직통길이 막혀 있다가 그 남쪽(지금 사직동과 송월동 사이에 있는 월암(月岩)이라는 바위 옆)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고 당분간 도성 서편의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세종 4년(1422)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修築)할 때에 서전문의 옹성(壅城)을 쌓아 보완하려다가 지대가 높고 험해 통행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아예 이 문을 헐고 지금의 신문로 2가 경희궁에서 송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새 문을 세운 후 다시 「돈의문」으로 명의복원(名義復元) 했다. 이렇게 해서 돈의문은 명실공히 서북방면의 관문으로 500여년간 인정(人定∼야간 통금을 위해 매일 밤 10시경에 28번 종각인경을 치는 것)에 닫고 파루(罷漏∼오경(五更)으로 새벽 4시경에 인경(큰 종을 33번 치는 것)에 문을 열었다. 급기야 일제(日帝) 강점하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돈의문을 철거하고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세 번을 새로 지은 문(門)이라 해서 「새문」또는 「신문(新門)」이란 새로운 이름을 백성들이 지어서 불러 주었다. 연하여 「새문안」 「새문밖」이란 말이 생겼다. 따라서 「새문의 안쪽 길」이란 뜻으로 오늘날 「새문안길」이란 길이름이 생겼고 「신문로(新門路)」란 법정지명이 생겼으며 「새문안교회」란 교회 이름도 나오게 됐다. 현시(現時) 그 새문밖 지역이 서대문구(西大門區)로 남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에 옛 「돈의문」은 환희(歡喜)로 받아들이며 안도의 숨을 쉴 것이다.